2025-07-31
김혜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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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비교적 차분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 그리고 성적인 장면이 거의 배제된 점이 오히려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점에서, 무라카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인물 ‘쥐’를 떠올렸다.
‘쥐’는 섹스 장면이 없고, 누구도 죽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하던 소설가 지망생이다. 어쩌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바로 그 쥐의 오랜 염원이 실현된 결과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라카미가 이 작품의 원형을 처음 구상한 해가 1980년대였고, 이후 40여 년이 지나 완성된 것이 2022년이라 하니 더욱 그렇다.
열일곱 살 남고생인 ‘나’, 열여섯 살 여고생인 ‘너’. 두 사람은 고교생 에세이 대회에서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나’는 어리둥절하지만 이내 소녀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 이야기를 따라 도시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해 가던 나날, 돌연 소녀가 사라진다. 우연한 사고인지, 무언가의 암시일지 종잡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결국 소녀가 말했던 미지의 도시로 향한다.
그림자를 두고, 눈에 상처를 입히고야 들어가는 도시 , 그리고 그 도시에서 하는 일이 책이 한권도 없는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것이라고 했다. 주인공은 이미 중년이 되었는데 소녀는 여전히 16세 그 모습이다. 주인공 남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 시계탑의 시계는 바늘이 없다. 바늘없는 시계탑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가 아니라 시간이 의미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라는 말이 이 도시의 성격을 잘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 도시에는 개나 고양이도 없고 음악도 없으며 주변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 모습으로 땅만 보고 걷는 모습이다.
하루키의 문학적 장치가 등장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약간의 긴장을 느끼게 된다.
16세의 남자주인공은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K를 떠 올리게 하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나이로 어른의 문턱을 넘는 나이, 주인공은 나이를 먹었지만,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시절의 사랑이, 16세 소녀로 기억 속의 고정된 이미지’로 남아 있다(상실감)
도서관은 지식과 기억, 즉 축적된 정신의 공간이고, 그곳에서 ‘꿈을 읽는다’는 것은 개인 혹은 집단의 무의식의 조각들을 해석하는 작업으로 융을 떠 올리게 한다.
도시는 하루키 소설에서 늘 반복되는 또 하나의 세계, 혹은 내면이 투영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불확실한 벽’이라는 모티프가 반복되며,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 사랑과 상실 사이에 놓인 우리 존재의 애매한 경계들을 은유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벽은 결코 끝나지 않는 영혼이 앓는 역병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대화가 인상적이다(하루키는 실제로 2020년 코로나 19로 집에 칩거하며 이 소설을 3년여에 걸쳐 썼다고 한다)
주인공은 ‘불확실한 벽’ 너머의 도시에서 나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느덧 중년이 된다. 오래 몸담았던 출판 유통업계 일을 그만두고, 도호쿠 지방의 작고 조용한 산속 마을에서 도서관 관장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그곳에서 전임 관장이었으나 이미 1년 전에 죽은 70대 중반의 고야쓰가 찾아온다. 일명 유령이라고 할 수 하는데 유령이지만 혼령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존재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 고야쓰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즉 사서 ‘소에다’와 노란 잠수함이 그려진 옷을 입고 매일 도서관을 찾아와 엄청난 속도로 책을 읽어나가는 ‘M소년’이다. 이 소년의 나이도 16세이다 이 고야쓰라는 인물을 통해 하루키는 ‘영적 존재(Spirit)’를 도입함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는 죽었지만 말하고,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며, 무엇보다도 기억과 시간의 벽을 넘어 우리 곁에 다가오는 존재였다.
노란 잠수함이 그려진 옷을 입은 M소년도 16세의 나이이다. 역시 사랑과 상실을 경험하는 나이로 주인공 나의 내면에 아직 남아았는 미성숙한 자아의 모습인가 싶다. 이 소년도 어느 날 열병에 걸려 고생하던 어느 날 밤에 잠옷을 입은 채로 연기처럼 사라지게 된다. 이 소년도 자기 그림자를 허물처럼 벗어 놓고 도시에 들어가게 된다. 다시 도시에 들어 가 있던 주인공과 이 M소년이 만나게 되면서 주인공과 소년은 한 몸이 된다. 주인공은 도서관에서 꿈을 껍질로 부터 꺼내는 역할을 하고 M소년은 그것을 해독하는 일을 맡게 된다.
M소년은 주인공의 내면에 갇힌 과거의 ‘나’, 고통과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분리된 자아로서 도시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건 기억과 감정의 통합 과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이 부분도 융(C.G. Jung)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인간이 온전한 자기(Self)가 되기 위해 무의식 속 그림자, 감정, 과거와의 통합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읽혀진다.
도서관에서 주인공이 꿈을 껍질에서 꺼내고, 소년이 그것을 해독하는 구조는 무척 시적이다. 이건 하루키가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 곧 작가란 잃어버린 감정과 기억을 수면 위로 꺼내고, 그것을 해석하고 재구성해 세계와 이어주는 사람이라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출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작성자 무침이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