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3
이상진
현대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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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은 미술의 ‘상식’을 거스르기 때문에 어렵다. 세계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주기는커녕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들거나, 뭔가를 보여주더라도 형편없게 또는 제멋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상식에 반하는 현대 미술을 설명해준다며 나서는 미학적 개념들은 더 어렵다.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개념이지만, 그 각각이 난해할 뿐 아니라 서로의 관계는 더 난해하여, 안내자가 되기보다 진입 장벽이 되기 십상이다.
『현대미술 강의』는 미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기호’라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 난관을 돌파한다. 저자는 미술의 역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대 이전의 시기에 언제나 세계를 ‘재현하는 기호’였던 미술이 더 이상 이런 기호이기를 거부했던 때를 현대 미술의 시발점으로 잡는다.
재현을 거부한다는 것은 현대 이전에 미술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현하는 기호로부터 재현을 거부하는 기호로의 이동은 현대의 전과 후를 가르는 미술사 전체의 기호학적 전환이다.
다음으로, 현대 미술사 내부의 기호학적 전환은 현대 미술의 독보적 성취인 순수 미술을 중심축으로 해서 제시한다. 낭만주의가 고전주의에 맞서면서 시작된 재현의 거부는 한 세기가 넘는 점진적 노력의 경주 끝에 세계를 미술에서 완전히 밀어낸 순수한 기호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그러나 순수 미술의 승리는 미술과 세계의 단절을 초래했으니, 여기서 생겨난 것이 반예술의 기치 아래 미술과 세계의 새로운 접속을 시도한 아방가르드다. 모더니즘의 순수한 기호는 완결되어 있다. 즉 기표(작품)와 기의(작가의 창조성)가 단단히 결합되어 있고, 이런 상태로 별천지, 즉 삶의 일상적 세계를 초월해 있는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존재한다. 아방가르드는 이런 미술의 위치를 다시 삶의 세계로 옮기려는 것인데, 그러려면 먼저 순수한 기호가 해체되어야 한다.
구성 대신 구축, 제작 대신 레디메이드, 완결성 대신 파편화 등 아방가르드는 순수한 기호를 분해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발전시켰으나, 1960년대까지도 모더니즘을 무너뜨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순수한 기호의 완전한 분해에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순수 미술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미술은 과정과 신체와 장소의 담론으로, 또 개념과 제도와 차용의 담론으로 정신없이 흩어졌다. 재현을 거부하는 기호가 순수한 기호로 완성되었다가 각종 담론의 기호로 해체된 것을 한 세기 반에 달하는 현대 미술의 행로로 제시한다.
이 책은 스탕달의 낭만주의 이론, 샤를 보들레르부터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이르는 모더니즘 이론, 페터 뷔르거부터 핼 포스터로 이어지는 아방가르드 이론, 그리고 프레더릭 제임슨, 로절린드 크라우스, 크레이그 오웬스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따로 또 같이 조명하여 현대 미술의 미학적 기원과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했다. 이 책은 미술 이론을 익히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충실하고 유익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미술의 주역은 또한 미술작품이며 미술가가 아니겠는가? 현대 미술의 전개가 유례없이 급진적이었던 만큼 이를 다룬 미술 이론들 또한 사고의 획기적 도약을 요한다. 이 쉽지 않은 독서의 여정 사이사이 안내판이 되어 혼란의 안개를 걷어낼 수 있도록 대표적인 미술가들의 활동과 그들의 역작도 함께 풍부하게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