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30
안계진
여행의 이유 [절판 주문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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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경험부터 최근의 여행경험까지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책이다. 글을 쓰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가 추방당한 경험부터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 여행담, “알쓰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한 후일담,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리기 위해 떠난 여행담 등 저자의 여행기 9가지를 에세이 형식으로 담고 있다.
저자는 이 9개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겐 ‘여행’이란 무엇인지 그동안 왜 그렇게 여행을 다녔었는지, 인간은 왜 여행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의 이유를 풀어나간다.
각 에세이별로 공감된 내용이나 계속 생각해보고 싶은 내용에 대하여 발췌해보았다.
1. 추방과 멀미
어쩌면 그는 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최소한 비자가 필요한지 알아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는 중국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겪은 정신적 멀미의 괴로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그가 처음으로 가본 외국이었고, 젊은 날의 환상이 깨져나간 곳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중국에서 추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히려 안온함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오래 미루던 소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요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2.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_데이비드 실즈』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냄새까지 지워야 하니까 호텔에선 가정집보다 훨씬 독한 세제와 방향제를 쓴다.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맡게 되는 그 냄새, 분명 처음에는 자연의 어떤 향을 흉내냈겠지만, 어느 순간 그 근원을 몰각한 듯한, 아니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한, 이제 그저 세제와 방향제로만 지각되는 그 익숙한 향의 습격을 받는다. 나라마다 호텔 냄새도 각기 다르다. 그러나 세제와 방향제 특유의, 여타 다른 잡냄새를 일거에 제압하는 독선적이고 인공적인 향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마치 새집에 들어선 것 같은 설렘을 느낀다.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몇 시간 전에 누군가가 서둘러 체크아웃하고 나갔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눈으로는 활짝 젖힌 커튼 밖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코로는 세제와 방향제 냄새를 맡으며, 그런 찜찜함을 잊어버리고 만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폐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상위’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봉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3. 오직현재
「당신의 나무」처럼 여행에서 겪은 일을 쓰기로 마음먹을 때도 있다. 그런 ‘영감’조차 집에 돌아왔을 때에야 떠오른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게 현재시제로 서술된다. 과적 픽업트럭에 실려 이동하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밀림 속으로 들어가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유적의 규모와 그 유적을 부수어버릴 듯 맹렬히 자라고 있는 나무의 위용에 압도된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지만, 그 주체를 초월하는 생생한 현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물러난다.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 다시 어린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4.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장례 풍습은 대를 거듭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매자의 풍습을 보고 그들이 어디에서 이주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언덕 위에는 봉분들로 보이는 부드러운 융기들이 잔디로 덮여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경북 고령이나 부산 동래의 가야 고분군들이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끝없이 이동하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 할 수 있었던 일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헙한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5.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모두 ‘방구석 여행자’이다. 우리는 여행 에세이나 여행 다큐멘터리 등을 보고 어떤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곳을 다녀온다. 그러나 일인칭으로 수행한 이 ‘진짜’ 여행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그곳을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우리는 또 다른 여행서나 TV의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이미 다녀온 곳을 그들이 여행하는 모습을 읽거나 보게 된다. 나와는 다른 그들의 느낌과 경험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어 내 여행의 경험에 얹힌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6. 그림자를 판 사나이
샤미소의 주인공은 요술 장화를 신고 전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지만, 『검은 꽃』의 인물들에게는 ‘장소’를 잃은 대부분의 이주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런 마법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가을 주코티공원에서 삼시세끼 피자를 먹으며 노숙하는 이들은 잠시 ‘사람’이었다. 주코티공원의 시위 참여자들은 서로를 환대했고, 1퍼센트의 탐욕에 분노하던 사회의 말 없는 99퍼센트도 피자를 보내 자신들의 환대를 표현했다. 일시적이나마 그들은 월가의 일부 주코티공원이라는 장소를 차지 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밤새 미국의 미래, 정치적 경제적 평등에 대해 토론했고, 그럴 때 그들에게는 또렷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주코티공원 일대는 늘 흥이 넘쳤다. 그러나 거기에 나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 년을 넘게 살았지만 곧 자리를 털고 떠날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사회에 아무 책임도, 의무도 없었다.
인류학자 김현경에 의하면 그림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원권’일 것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그림자가 없다면 아무리 고매한 사상과 윤리적 자아를 갖추어도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사람, 장소, 환대』의 관점에서 오디세우스의 귀향도 다시 읽을 수 있다.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의 침대에서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혜의 여신이 그를 다시 고난의 여행길로 끌어냈고 그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곳으로 돌아갔다. 자주 떠도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 그런 곳이 있기는 할까? 나는 거기에서 받아들여질까? 요술 장화를 신고 영원히 떠돌아 다니는 슐레밀,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내 운명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삶은 과연 온당한가? 요즘의 나 역시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7.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여행자가 보내는 신뢰는 환대와 쌍을 이루고 있다. 신뢰를 보내는 여행자에게 인류는 환대로 응답하는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구약성서의 소돔의 멸망 이야기는 여행자의 신뢰를 배신했을 때, 유목민의 신이 얼마나 커다란 벌을 내리는지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신뢰란 죽은 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신뢰 안에는 용기뿐 아니라 기쁨과 유쾌함도 들어 있다. 신뢰는 위기가 닥쳤을 때 웃게 해준다. 신뢰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잘 정의돼 있는 행동으로 이루어놓은 공간을 건너뛰어 그 자리에 당신과 함께 있는 진짜 개인과 곧바로 접촉하는 것이다.
노르망디 토박이인 그는 버스가 끊긴 시간에 배낭을 메고 걷고 있는 나의 곤란을 금세 이해하고 공감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그는 나를 숙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이런 환대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중략)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변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8.노바디의 여행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일 뿐이다.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난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남의 땅에서 우리의 힘은 약해진다. 약해지기 때문에 더욱 더 자기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의 환대와 인정, 선물이 필요하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런 습격을 부드러운 거래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거래로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어서 누군가는 동굴로 돌아온 키클롭스의 마음으로 외부인을 적대하거나 무시한다. 그럴 때 여행자는 더 큰 불안과 좌절을 겪고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행은 습격이 되고 여행자는 침입자가 된다. 그 결과는 불필요한 고난으로 여행자 자신에게로 돌아오곤 한다.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엄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9. 여행으로 돌아가다
뉴욕 시절에 아내가 말했던 그 ‘여행’은 아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을 것이다. 어느새 뉴욕에서의 생활도 말 그대로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운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공원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잠깐은 재미있다. 하지만 금방 지루해진다. 그러나 소설을 읽을 때는 다르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욱 몰입하게 된다. 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인다.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냥 일어나는 사건이 거의 없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재미있는 일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배제하면서 쓰인다. 독자들은 일종의 실험실적 환경에서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러나고, 그것을 인물이 어떻게 받아드리는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집중시키다. 우리는 한 도시의 핵심으로 돌진한다. 변두리의 단조로운 주택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현지인들이 겪는 자잘하고 어지러운 일상을 잠깐 맛볼 수는 있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여행자는 도시의 정수만을 원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핀다. 현지인들은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건물과 거리에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댄다. 여행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주말 홍대 앞의 인파가 새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고, 서울이 거대도시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치고 지나가는 게 전과는 달리 불쾌하고, 한강은 평소보다 더 드넓어 보인다. 식당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갈 때면 한국 음식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비슷한 일을 소설이 한다. 부부관계의 파경을 다룬 소설을 읽고 나면 독자 자신의 부부관계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탁월한 문장력으로 맥주의 맛을 묘사한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문득 냉장고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그때 마시는 한잔은 늘 경험하던 그 맛이 아니다. 문득 새롭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