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7
김성화
영원한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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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에 '경주, 룰라', '해상, '룰라'가 반복되어 궁금증을 자아냈다. 수동태로 시작되는 첫 문장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내가 그 남자의 집에 초대되었다.
초대된 건 이해상이다. 그녀는, '드림시어터'를 설계하는 디자이너다. 룰라는 거대 네트워크이자 빅 데이터이며 통합 플랫폼이다. 이곳엔 하고 싶은 일을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상세계가 존재한다. 그곳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극장 속 서사는 실제 삶과 똑같이 인식된다. 자신의 자아가 서사 속 주인공의 자아로 대체되기에 가상의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다. 인지하는 시점은 극장을 벗어난 후다. 극장 속 삶이 끝나야만 본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삶은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돼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극장 속 삶이 좋았다면 반복해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재시작되는 순간 이전 삶에 대한 기억은 말끔하게 사라진다.
이전 기억이 말끔하게 사라진다면 삶을 반복해서 살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을까?
룰라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세계를 극장, '룰라 극장'이라고 하며 이는 공용 극장이다. 개인 극장도 있는데 '드림시어터'라고 부른다. 원하는 사람은 드림시어터 안에서 자신의 실제 인생을 두 번째로 살게 된다.
이해상을 초대한 건 임경주다. 그는 해상에게 극장 설계를 의뢰한다. 극장을 설계하기 위해서 설계자는 의뢰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임경주의 이야기로 다시 시작된다.
경주는 아버지가 죽은 후 방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동생과 함께 살았다.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며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고 동생을 돌봤다. 어느 날 집에서 무기력하게 게임만 하고 아무런 노력도 안 하는 동생에 폭발한 경주는 동생을 때린 후 집을 나가라고 한다.
그다음 날 동생은 집을 나갔다. 두 달 후 동생은 시체로 발견됐다. 경주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부동산중개사의 권유로 살고 있는 집을 빚내서 샀다.
빚을 갚기 위해 삼애원이라는 재활원 보안 요원으로 취직했다. GM그룹 사회복지재단이 설립한 알코올이나 약물 의존 노숙자 재활 시설이었다. 삼애원은 서해 중부 끄트머리 마을인 영인시 제의면 예인곶이라는 오지 마을에 있다.
경주는 눈보라를 뚫고 간신히 삼애원에 도착했고, 입사 동기 제이라는 사람도 이어 도착했다. 보안요원은 팀장, 박정옥(옥희), 경주, 제이 4명이었다. 그 외에 총무팀 두 명, 전기기계실 기술자 한 명, 관리팀 세 명, 관리소장까지 총 7명이 근무했다.
이제부터 삼애원이라는 재활원에서 임경주가 보안요원으로 근무하면서 겪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요인물은 입소자 베토벤, 랑이언니(베토벤의 조카), 공달(앵무새), 그리고 경주와 제이의 숙적 칼잡이와 조리사, 고라니인데, 경주와 제이가 입사한 지 얼마 안 지났을 때 삼애원에 큰 소란이 있었고, 그 일 이후 경주와 제이, 칼잡이 조리사 간에 팽팽한 긴장이 이어진다.
한편, 어느 날 경주는 입소자들이 노숙자 살인사건 관련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된다. "어마하게 돈이 많은 미국의 한 생명공학 회사가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그게 룰라라는 건데 VIP 투자자들을 모집하기 전에 테스트를 위해서 인종별로 골고루 실험자를 선발했으며 시험에 실패해서 사람이 사라지더라도 뒤탈이 없을 무연고자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 무연고자들이 노숙자였는데 때가 되면 데려갈 수 있도록 그 사람들 핸드폰에 룰라 유심을 심어놨다는 것이 그 입소자의 주장이었다. 그러던 중 그 이야기가 불편했는지 윤식이라는 입소자가 채널을 돌려 버린다. 경주는 그 말들이 동생의 죽음도 그것과 연관이 있다는 입소자들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심난했다.
어느 날, 밤 근무를 서던 경주가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갔다가 둔기로 맞아 쓰러져 있는 제이를 발견해서 업고 들어온다. 죽을 뻔한 제이를 구한 것이다. 간신히 제이를 실내에 들여놨는데 제이는 잠꼬대처럼 누군가를 부른다.
해상은 당황한다. 제이가 누군가를 부르는 그 시점에서 의식의 가장 구석진 방에 몰아넣고 봉인한 기억을 떠올린다. 삼애원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매일 밤 입소자 몇 명이 어딘가로 사라진다. 제이는 그들을 추적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경주는 삼애원에 숨어 있는 비밀을 찾기 위해 직접 나선다.
베토벤, 랑이 언니, 칼잡이, 고라니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경주의 이야기를 듣다가 당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윤식이 바다 절벽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시신을 발견 한 사람이 경주였으므로 경찰은 경주를 의심했다. 경주는 의심을 벗기 위해서라도 비밀을 풀어야 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는 것으로 보였다. 매일 입소자 한 명씩 외부로 불러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룰라에 보낸다는 건 정보 형태로 네트워크에 업로드시킨다는 얘기야. 몸을 뺀 나머지, 그러니까 한 개체의 고유한 의식, 무의식, 본성, 반사작용, 감각이나 신경회로 같은 것들 모두."
319P
룰라는 영원을 꿈꾸는 인간 욕망이 만들어 낸 가상 세계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에 사람들은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무한한 권태가 찾아올 것이다.
그 권태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곳엔 심심한 자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지 않던가. 쾌락엔 끝이 없다. 권태를 해결해 주는 프로그램도 무한정 필요할 것이다.
경주는 해상에게 삼애원 이야기를 들려준 후 삼애원 사건 이후 30쪽을 백지로 설계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자신이 왜 사는지 이해하기 위해 운명의 설계 없이 살아 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상은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 경주의 삶에 나타나는 드림시어터를 설계한다.
경주는 위험이 닥칠 때마다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불러내어 위험에 맞섰다. 동생을 잃었을 때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일어섰다. 그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칼잡이와 목숨이 달린 싸움에서 자기 가슴에 칼이 박히는 순간에 칼잡이의 눈을 찔렀다. 경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강했다.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삶에 닥치는 고난과 시련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맞섰다.
대면하기 위해서였다. 피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기억과 마주 보기 위해서였다. <중략>
받아들이면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 같아서. 승주와 제이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뭔지 깨달았다. 죄책감과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분노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분노는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표출하지 못한 억눌린 감정들이 죄책감이 되고, 슬픔이 되고 두려움이 되었다. 경주는 그것들에 맞서기 위해 싸웠다.
모든 것을 설계한 자가 간과한 것이 그것이었다. 경주가 살고자 했던 그 욕망, 맞서려 했던 그 욕망을 간과함으로써 설계자는 실패했다.
다 읽고 생각하니 뒤죽박죽이었다. 무척 재밌게 읽기는 했는데, 순서가 꼬여있고, 앞뒤가 바뀌어 있었다. 책을 훑어보며 다시 정리해야 했다.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책을 아주 간단하게 다시 요약해 본다.
1장 - 해상이 경주에게 초대된다. 해상은 드림시어터 설계자다. 설계를 부탁한다. 이야기를 듣는다.
2장 - 경주는 동생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알코올중독, 약물중독자 재활원인 삼애원에 보안요원으로 들어간다. 제이를 만난다. 제이가 공격을 당한다. 해상이 경주의 이야기를 듣다가 떠나버린다.
3장 - 해상이 과거를 회상한다. 해상이 아버지와 이집트에 간다. 남자친구를 만난다. 사막 투어를 하던 중 사랑에 빠진다. 해상은 엄마로부터 유전된 병에 걸렸다. 남자친구는 해상에게 룰라 프로그래밍을 가르쳐 준다. 남자친구는 어디론가 떠났다. 이 생각에 이르러 해상은 다시 경주를 찾아간다. 이야기를 더 들을 필요가 있었다.
4장 - 경주는 삼애원의 비밀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베토벤이 공격당한다. 제이가 죽는다. 경주가 죽을 고비를 넘긴다. 베토벤의 비밀이 풀린다. 경주가 해상 아버지에게 유심을 넘긴다.
5장 - 해상이 룰라에 업로드된다. 사막 여우를 거쳐 인간으로 돌아오다. '드림시어터'를 만들다. 경주에게 초대된다. 경주가 해상에게 삼애원 이후 30쪽의 설계를 부탁한다. 삼애원 이후 업로드되기까지 3년 가까운 세월을 백지로 설계해 달라는 것이다. 해상은 결국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다만, 해상은 하나의 드림시어터를 더 만들어 자신이 들어간다. 경주의 삶에 등장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어떤 인물로 등장할 것인가.
6장 - 경주의 드림시어터, 경주는 삼애원 이후 병원에 취직해서 같은 팀 후배 지은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은이 사고로 죽었다. 세월이 흐른 후 경주는 만경 빌리지라는 실버타운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윤희라는 여자를 만나고, 칼잡이를 다시 만난다. 칼잡이는 윤희를 납치해 경주를 협박해서 유심을 빼앗는다.
아직까지는 영원히 사는 인간은 없다. 고작해야 백 년을 못 살고 거의 대부분이 죽는다. 그 짧은 세월 동안 인간은 온갖 어려움 즉, 괴로움과 고통, 어려움, 슬픔, 이별, 상처, 고난과 마주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간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간다. 마주하는 고통들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마주하고 헤쳐 나가야 할 삶 그 자체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아등바등 위험을 회피해가며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살려고 애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삶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면? 이 소설에 나오는 룰라, 드림시어터가 실제로 개발돼서 우리가 업로드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기독교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마치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닿으려는 죄와 같은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8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였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이를 믿지 못하고 거짓 천국을 꿈꾸느냐."
인간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긴 생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불멸 까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상 세계로는 가능할지 모른다. 이 작품 속 룰라처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세계. 하지만 그곳이 영원한 천국이 될 수 있을까? 죽지 않는 삶이 천국이 될까?
작가의 상상의 세계로 만들어진 이 소설은 허황된 얘기가 아니라 머지않아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로 들렸다. 이 긴 이야기를 치밀한 구성으로 균형감 있게 써 내려간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이런 걸 필력이라고 해야 하나? 글은 짓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긴 글을 지어내려면 얼마나 오래 앉아서 글을 써야 하나. 오래 앉아 있는다고 써질까. 그 수많은 문장들은 어디서 불러낸 걸까.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중요 포인트에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재미있게 읽었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나서 머리가 띵하게 헷갈리는 연결 부분이 있어서 다시 훑어봐야 했다. 마지막, 칼잡이의 정체 때문에 한참을 생각했다.
그만큼 단순하지 않은 구조이고 재미가 있는 소설이라는 증거다. 내가 만약 드림시어터에 업로드될 수 있다면 무엇으로, 어느 시점으로, 어느 장소로 들어가고 싶을까. 독자들은 이걸 생각하며 읽는다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