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9
김병백
이순신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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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새로운 책..., 우리나라에서 이순신장군과 그의 일생 그리고 임진왜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동안 이순신장군에 관한 연구자료 및 책들은 수도 없이 발간되었지만, 이순신의 바다처럼 이순신의 생애 및 전투 상황들을 짜임새 있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 책들은 드물었던 것 같고, 그래서 새로운 책이 나와 읽어 보면 또 새롭다. 이 책은 이순신의 유년시절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를 순서대로 서술한 책이다.
이순신은 1945년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 하였으며, 무과 진행 중 낙마하였으나 부상을 입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시험을 치른 일화는 모두가 아는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나선다. 이순신의 성품은 청렴하고 정도를 걸었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으로 요즈음 이야기로 사회성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품때문에 초기 관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현감으로 부임하게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정3품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가 된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머지 않아 일본이 침략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함께 전략을 짜내며 전쟁을 준비한다. 이순신은 스스로 군권을 책임지는 최고 지방관이자 사령관으로서 행정력을 정비하였으며, 또한 바다에서 싸워야 하니 전투선 개조에 전력을 다했다.
판옥선 건조를 독려하고, 원거리 공격을 강화하기 위하여 함포를 개선하고 이를 판옥선에 장착하였다. 그리고 튼튼하지만 무거운 판옥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격군(노군)들을 강하게 훈련 시켰으며, 수군들을 강군으로 만들기 위하여 맹훈련(특히 궁술훈련)을 시켰다. 이렇게 전쟁을 예견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이순신이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내전을 끝낸 강한 무사들인 일본 병사들과 백병전을 벌이면 전쟁 경험이 없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백병전을 피하려면 일본 병사들이 판옥선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순신은 판옥선에 지붕을 씌우고 칼과 송곳 등을 꽂아서 발 디딜 곳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수에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측면 등에 총포구멍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거북선이다.
일본의 침략에 철저히 준비한 이순신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불패신화를 이루어 냈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임진왜란 1차 옥포해전(1592년5월7일 ~8일)은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적선 42척을 격침하고 승전을 거둔다. 2차 사천해전(1592년5월29일 ~6월10일)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차레로 63척을 격침시키고 당포해전에서는 적장 가메이 코레노리를 전사케 하고 승전을 거둔다. 3차 해전은 이순신의 3대 해전으로 유명한 한산도대접이다. 한산도대첩은 1592년7월6일 ~13일) 한산도 및 안골포에서 적선 79척을 격침하고 승전을 거둔 해전이다. 한산도대첩에서는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승전을 하는데 이는 이순신의 전술과 잘 훈련된 휘하 장병들의 시너지로 이룬 해전이다. 4차 부산포해전(1592년8월24일 ~9월2일)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총 135척의 적선을 격침하고 대승을 거둔 해전이다. 그러나 대승을 거둔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 장수 정운이 전사한다. 5차 웅포해전(1593년2월10일~3월6일)에서 패한 일본은 조선을 제외한 채 명나라와 휴전을 논의한다. 휴전 논의는 성과 없이 한해가 가고 6차 제2당항포해전(1594년3월4일 ~5일)이 발발한다. 그리고 조정의 선제공격 명령으로 7차 장문포 해전(1594년10월1일)이 끝나고 휴전기에 들어 간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 협상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당연시 되고 있는 시점에 이순신은 일본의 간계와 원균의 모함으로 파직을 당하고 온갖 고초를 겪다가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고 칠천량해전(1597년7월14일 ~16일) 발발하고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판옥선 200여척이 격침당하고 수많은 수군들이 전사했으며, 배설이 12척만을 이끌고 후퇴한다. 칠천량해전 패전 이후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 되면서 12척의 전선을 인계 받게 된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통합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다"는 장계를 올리고 수군을 정비하며 전투 준비를 한다. 칠천량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보급에 자신감이 생기자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정유재란 첫 전투는 명량대첩(1597년9월16)이다. 남은 12척으로 수군을 재건하여 명량에서 적선 133척중 31척을 격침시키고 적장 구루마사가 전사시킨다. 9차해전은 절이도해전(1598년7월19일)으로 적선 50여척 격침시켰으며, 마지막은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1598년11월18일 ~19일) 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군에게 본국으로 송환 명령이 내려지나 조선 수군이 퇴로를 열어 주지 않자 일본군은 명나라 장수 유정을 회유하여 빠져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을 그냥 돌려보내려 하지 않고 마침내 노량해협에서 마지막 해전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남해앞 관음포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조총으로 강력하게 저항하며 후퇴를 한다. 이때 유탄에 이순신이 맞고 전사하게 된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거의 전멸을 하게 되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이 종결된다. 왜란 이후 이순신의 행적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순신이 조선과 조선의 백성을 구해낸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600년 조선왕조도 없었을 수도 있고, 우리나라도 300여년 전에 벌써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했을 수도 있다. 시대에 따라 출신에 따라 대중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냐에 따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르고, 사가의 해석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일관적인 평가와 찬양을 받는 인물도 있다. 이순신장군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다짐을 떠올려 본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