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5
최혜진
지구의 짧은 역사(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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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이나 그랜드 캐니언에서 볼 수 있는 층층이 쌓인 지층은 일종의 책이다.
지층의 종류, 색, 질감, 두께 등은 지구만의 언어로 기록된 문서이며 이를 해석하고 읽어내면 지구가 들려주는 근사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지구는 누구보다 스토리텔링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지구의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지구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평생을 바친 과학자들은 지층 사이의 관계와 방사성동위원소의 반감기 등을 이용해 가장 오래된 지층과 최근에 만들어진 지층을 구분하고, 지층 사이에 잘 보존된 화석을 연구해서 장구한 세월 동안 지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밝혀낸다. 또 지구의 전 생애를 이해하려고 지구 곳곳에 흩어진 지층을 모은 뒤 공통점을 찾아 이어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층을 잇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지층은 이미 사라졌고, 어떤 것은 뒤집혔으며, 어떤 것은 끊기고 잘린 뒤 덧씌워졌다. 그래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면 가능한 많은 표본을 수집한 뒤 분석과 추론을 통해 사실을 밝혀내야만 한다.
『지구의 짧은 역사』는 이처럼 실증에 기반을 두고 생산한 지구에 관한 지식을 시간순으로 풀어 쓴 책이다. 46억 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지구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과학자들은 지구 곳곳에 흩어진 지구 역사의 증거를 찾아내 해석한 뒤 이를 잘 조합해 지구의 생애를 한눈에 보고자 노력한다.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기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으므로 저자는 지구의 일생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는 대신 여덟 가지 관점으로 들여다본다.
저자는 화학, 물리, 생물, 산소, 동물, 식물, 멸종, 인간의 관점에서 지구의 스냅샷을 찍고 그 장면을 아주 자세히 묘사한 뒤, 이런 장면이 나오게 된 인과관계를 설명한다. 저자가 이처럼 여덟 개의 단면으로 지구의 역사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지구는 돌덩어리이고, 그 단단한 고체를 바탕으로 바닷물이 고여 있으며, 대기가 그 둘레에 감싸고 있는 무생물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과학자들도 이 모든 것을 따로따로 다루었다. 지질학자는 땅을, 고생물학자는 화석을, 대기과학자는 공기를, 해양학자는 바다를, 천문학자는 우주만을 다루며 서로 다른 분야라고 여겼다.
하지만 각 분야를 파면 팔수록 이 모든 분야가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고 빠른 컴퓨터가 나오면서 보다 복잡한 모델링 작업이 가능해졌는데, 자연에 가까운 모델을 만들려면 그동안 분리해서 생각했던 대상을 통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통적인 지구과학에서 다루지 않았던 생물, 수권에 넣어 다루었던 남극과 북극의 빙하, 고도의 지적 생명체인 인간이 지표면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 권역을 지구과학에 재편해 지구시스템과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스템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것은 지권, 수권, 기권, 생물권, 설빙권, 인간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도 이런 점을 강조한다.
이처럼 무생물이라고 여기던 지구를 이해하기 위해 생명과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한층 높은 곳으로 이동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생물과 생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거시적인 규모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을 상상, 증명, 인정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거대한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생물과 무생물의 지위는 같다. 누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판단할 수 없다. 생물과 무생물은 모두 물질을 기반으로 한 존재들이고 서로 동등한 영향을 주고받으니, 결국 이들은 평등하다.
돌과 생명 사이도 평등하다면 생물과 생물 사이의 지위는 어떠한가? 인간은 모든 생물보다 우월하고 중요할까? 모든 생물이 평등하다면 오로지 먹기 위해 인구보다 많은 수의 동물을 기르거나, 구경하려고 동물을 납치해 가두어 두는 것은 타당한 일일까? 젠더 갈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 약자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것은 옳은 일일까? 나아가 외골격계를 장착하거나 수정체 대신 렌즈를 삽입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기기로 대체한 포스트휴먼이나 땅속에서 꺼낸 금속으로 만든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은 유기체만으로 이루어진 인간보다 못한 존재일까?
지구시스템과학이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모든 것을 생물 중심, 나아가 인간중심으로만 생각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은 이렇게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지구과학과도 상호작용하고 있다.
인간중심의 사고를 탈피하는 일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룬 인간권의 문제를 곱씹어 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어떤 생물보다 강하고 빠르게 지표면을 변화시킨다. 나무를 베거나 태우고 그곳에 단일 식물을 재배해 땅의 성질을 바꾼다. 물성이 달라진 땅은 햇빛을 반사하거나 흡수하는 양이 급격히 변한다. 그 결과 대기의 온도가 급격히 변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이 지구를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조금만 생각의 중심을 바꾸면 급변하는 지구표면의 문제, 곧 기후변화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