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9
김종성
이기적유전자(40주년기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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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도킨스는 이 책에서 '이기적 유전자'라는 도발적인 개념을 통해 생명 진화의 주체가 개체나 종이 아닌 유전자임을 역설하며, 생명의 본질과 행동 양식을 설명한다.
책은 생명체를 유전자의 생존과 복제를 위한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로 정의한다. 이 관점에서 개체의 이타적 행동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려는 유전자의 '이기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어미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행동은 자식과 공유하는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유전자의 전략이며, 벌의 불임 개체가 여왕벌을 위해 헌신하는 것 또한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자신의 유전자를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유전자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주류였던 개체나 종 중심의 진화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도킨스는 유전자를 '불멸의 존재(immortal replicators)'로 묘사한다. 개체는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복제되며 이어지는 영속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유전자가 자신을 보존하고 복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운반체(vehicle)'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는 생명의 목적에 대한 통념을 뒤집고, 우리의 존재 의미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고귀함이나 특별함을 논하기 전에, 우리 내부의 유전자가 끊임없이 자신을 복제하려는 냉철한 생존 전략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하게 된다.
도킨스는 단순히 유전자의 생존과 복제를 넘어, 유전자의 영향력이 개체의 몸을 넘어 환경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 개념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비버가 댐을 짓는 행동은 비버 유전자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달팽이에게 기생하는 흡충이 달팽이의 행동을 조작하여 새에게 잡아먹히게 유도하는 현상 또한 기생충 유전자가 숙주 달팽이의 표현형을 조작하는 사례로 제시된다. 이 개념은 유전자의 영향력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 복잡한 생태계와 상호작용 방식에까지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며, 생명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유전자의 역할을 더욱 폭넓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더 나아가 도킨스는 문화적 진화의 단위로 '밈(Meme)'이라는 혁신적인 개념을 소개한다. 밈은 유전자처럼 복제되고 전파되며 진화하는 문화적 정보 단위로, 노래, 사상, 유행, 종교, 기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정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듯이, 밈은 문화적 정보를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밈 개념은 『이기적 유전자』가 단순히 생물학 서적에 머물지 않고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영감을 준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밈을 통해 언어, 도덕, 예술 등 인간 사회의 복잡한 현상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파되며 진화해 왔는지를 유전자 진화의 메커니즘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밈 개념은 현재 인터넷 시대의 바이럴 콘텐츠(viral content)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효하게 사용될 만큼 그 통찰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발표 이후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가장 큰 비판 중 하나는 '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으로의 오해 가능성이다. 도킨스는 인간 행동의 모든 것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행동에 대한 근원적인 경향성을 부여할 뿐 환경과 문화의 영향도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고, 이는 사회적 책임 회피나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오용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표현은 많은 이들에게 윤리적 혼란을 야기했다. 도킨스는 유전자의 이기성이 은유적인 표현이며, 유전자에 의식이 있거나 의도적인 악행을 저지른다는 의미가 아님을 강조한다. 이는 유전자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신의 복제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일 뿐, 인간 사회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은 인간 본성의 이기성을 정당화하거나, 이타적 행위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가치는 변함없이 유효하다. 이 책은 생물학적 현상을 유전자라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부터 설명하려는 시도를 통해 진화론적 사고방식의 지평을 넓혔다. 또한, 인간 행동의 심층적인 동기를 탐구하는 데 있어 유전자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 40주년 기념판에 추가된 서문과 주석들은 이러한 논쟁점들을 명확히 하고, 도킨스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현대에 들어 유전체학, 행동유전학, 진화심리학 등 관련 분야의 발전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제시된 많은 가설들이 실제 과학적 연구를 통해 검증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특정 유전자가 사회적 행동이나 심리적 특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들은 도킨스의 통찰력이 단순히 이론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한 과학 교양서를 넘어, 우리의 존재와 행동, 그리고 사회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지적 도구이다. 이 책은 유전자라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생명의 거대한 흐름을 통찰하게 하며, 우리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와 문화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유전자의 이기적인 특성에서 출발하여 이타성과 협력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나아가 밈이라는 문화적 유전자의 개념까지 확장하며, 인간 문명의 다양한 측면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