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8
이혜리
소년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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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의 참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으로, 한강은 소년 동호와 주변 인물들의 파편화된 기억을 이어 붙이며 진실의 얼굴을 드러낸다. 책장을 넘길수록 가슴이 조여 오고, 문장을 따라 내려갈수록 내 안의 분노가 고개를 든다. 이 소설은 과거의 비극을 박제하지 않고, 오늘의 독자에게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는 현재형의 질문으로 변환한다.
소설의 구조는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지는 다성적 합창이다. 시신 수습소에서 시작된 기억은 생존자, 목격자, 가해에 협조한 주변인, 그리고 죽은 자의 목소리로 이어지며 사건의 깊이를 확장한다. 특히 동호의 시점은 독자를 광주 한복판으로 데려와, ‘역사’라는 단어 뒤에 숨은 인간의 체온과 떨림을 체감하게 한다. 그 떨림은 단지 연민을 자극하는 장치가 아니라, 진실을 마주할 때 피할 수 없는 감각적 증거다.
한강은 폭력을 묘사하면서 선정적 세부를 쫓지 않는다. 대신 침묵과 공백, 몸의 기척,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무너지는 존엄을 천천히 보여 준다. 시신의 무게를 떠안은 사람들,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는 시민들의 모습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인간이 인간으로 남고자 애쓰는 의지를 증언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눈물은 감상에 머물지 않고, 연대라는 실천으로 방향을 튼다.
작품을 읽는 내내 ‘기억’과 ‘책임’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은 상처의 그림자이지만, 그들의 증언이야말로 어둠을 가르는 등불임을 소설은 말한다. 기억은 과거를 붙드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잊지 않겠다는 말은 애도의 언어이자 사회적 약속이며,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준비다.
광주는 특정 지역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국가가 시민을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은 빈 껍데기가 된다. 『소년이 온다』는 그 무너짐의 과정을 한 개인의 생애 곡선과 포개어, 추상적 정치가 어떻게 일상의 식탁과 잠자리, 가족의 대화까지 침식하는지를 보여 준다. 결국 정치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말의 톤 속에 존재한다.
문장 수준에서 한강의 미학은 절제와 울림으로 요약된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은 오히려 독자의 내면에서 더 큰 메아리를 만든다. 특정 장면을 설명하기보다 여백을 남기는 방식은 독자가 스스로 빈칸을 메우도록 이끈다. 그 과정에서 독서는 재현을 넘어 체험이 되고, 체험은 다시 책임의 촉수로 변한다.
책을 덮고 난 뒤 오래도록 잠을 설치게 한 것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기억은 기록으로, 기록은 교육과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 왜곡과 혐오가 플랫폼과 정치적 계산 위에서 증식하는 오늘, 우리는 더 치열하게 사실을 확인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연결해야 한다. 애도는 공감의 정착이 아니라 행동의 출발점이다.
『소년이 온다』는 비극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낸다. 소설은 우리에게 상처의 깊이를 강요하는 대신,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을 힘을 건넨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권할 것이다. 반복해서 기억하고 말하는 일이야말로, 그날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현실적인 연대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작품은 ‘누가 말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서사 윤리의 질문도 던진다.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전유하지 않기 위해, 개별 목소리의 호흡을 존중하고 발화의 자리를 신중히 배치한다. 독자는 증언의 현장에 초대되지만, 판단의 최종 열쇠는 독자 스스로 쥐도록 남겨 둔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설명되지 않은 공백이 남는데, 그 공백이야말로 우리가 채워야 할 사회적 책임의 자리다.
마지막으로, 『소년이 온다』를 둘러싼 논쟁과 금서의 역사, 증언집과 사진 자료의 지속적 발굴은 왜 문학이 여전히 필요한지를 역설한다. 법과 제도가 미처 닿지 못한 영역에서 문학은 인간의 얼굴을 회복시킨다. 이 소설을 읽는 일은 고통의 재현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을 갱신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