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1
최정헌
검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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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침묵 속에서 자라난다
우리는 흔히 상처받은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더 공감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은지 작가의 《검은 점》은 그 순진한 믿음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균열을 낸다. 이 소설은 피해자가 어떻게 가해자가 되는지, 연대가 어떻게 배신으로 뒤틀리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무게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가슴을 짓누른다.
무영이라는 거울
주인공 무영은 어린 시절 수치스러운 폭력을 경험하고도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 오히려 소문의 희생자가 된 인물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검은 점’—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흔적이다. 무영은 그 점을 감추기 위해 침묵과 무관심이라는 갑옷을 입고 살아간다. 이 설정이 탁월한 것은, 무영의 침묵이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라는 점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작가는 무영의 내면을 과잉된 감정 없이, 건조하면서도 정밀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더 아프다.
연대의 빛과 그림자
무영이 동료 화영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갖지 못한 용기다. 직장 상사의 추행에 당당히 맞서는 화영의 모습은 무영에게 대리만족이자 희망이 된다. 여기까지라면 이 소설은 연대와 치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검은 점》은 그 따뜻한 서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무영이 자신의 애인과 화영의 관계를 의심하는 순간, 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지지는 공격으로 뒤바뀐다. 무영이 화영을 무너뜨리는 '비틀린 선택’을 하는 과정은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납득이 된다는 점에서, 독자를 불편한 자리에 앉힌다. 우리는 무영을 비난하고 싶지만, 그녀의 상처를 이미 목격한 뒤이기에 쉽게 돌을 들 수가 없다.
직장이라는 무대, 사회라는 구조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직장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직장은 위계와 익명성, 소문과 평판이 교차하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다. 작가는 이 일상적 공간 안에서 직장 내 성희롱, 익명 뒤에 숨은 집단 폭력, 피해자를 향한 의심과 낙인 등을 밀도 높은 서술로 펼쳐 놓는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독자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현실의 폭력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특히 개인적 트라우마와 사회의 구조적 여성혐오가 연결되는 서사 구조는, 폭력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재생산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짧지만, 깊다
2026 모노스토리 단편소설 공모전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택된 이 작품은, 서사와 인물, 주제의식이 고르게 조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평가에 깊이 동의한다. 단편이라는 짧은 호흡 안에서 이만큼의 서사적 긴장과 주제적 깊이를 성취한 것은 놀랍다. '단 하나의 이야기, 단 하나의 울림’이라는 모노스토리의 컨셉에 《검은 점》만큼 어울리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소설의 울림은 단 하나이되, 그것은 오래 지속되는 종류의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