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열아홉에 만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그 사랑의 대상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 속 여성은 ‘못생긴 얼굴’을 가진 인물인데, 그녀를 통해 외모 지상주의와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외모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 실제로 외모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조금 더 잘생기고 더 예쁘다는 이유만으로도 큰 장점이 된다. 그래서 남성들도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루밍족’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진 만큼 남성들도 외모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만큼 외모는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경쟁력이다.
하지만 반대로 외모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못생김의 기준이 없는데도, 단순히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부족한 사람처럼 바라본다. 그래서 못생기면 사회성도 떨어지거나 능력이 없다는 편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잘생겼다고 뭐든지 잘 하는 건 아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외모가 주는 첫인상을 지나치게 신뢰한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단순히 외모 지상주의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외모와 자본주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보여주는데, 위 문장은 그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 것 같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움직인다.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소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는 우리들을 남과 비교하게 만들었고, 우위에 있기 위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소비를 반복한다. 더 예뻐 보이기 위해, 더 멋져 보이기 위해, 더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꾸민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건,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과연 삶의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왜 우리는 더 예쁘고 더 키 큰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호의를 보내고,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멸시를 보내는 것일까.
이는 남보다 우월해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취집’이라는 단어가 있다. 단지 자신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누군가와의 외모에서 우위에 있을 때, 돈 많은 시댁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의 결실 같은 말처럼 들린다. 이런 단어이 익숙한 사회에서는 결국 외모는 자본주의에서 우월한 유전자가 될 수 있는 기회이고, 살아남기 위해서 더 많은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외모 하나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외모는 우리 삶의 답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을 끝내 지탱하는 건 외모가 아니라 사랑이라면서 말이다. 그 사랑 중에서도, 외면이 아닌 가장 순수한 내면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외모 비판 때문이 아니라, 작품이 끝내 보여주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 마음이 움직였던 게 아닐까.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 감정을 마지막까지 충분히 아름답게 담아낸 소설이다. 이런 순수한 사랑의 결말이 앞서 아내가 말한 반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