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요즘 독립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시대에는 나같은 소시민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과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등 다양하고 복잡한 삶에 대한 고민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의 삶에 대한 평가도 그 시대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평가도 천양지차로 달라졌을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립운동가로 불리우고 소수의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 31살의 청춘에 생을 마감한 안중근 의사(義士)의 독립전쟁에 관한 이야기 하얼빈
이 책을 읽기 전에 뮤지컬 영화 ‘영웅’을 통해서 안중근 의사의 삶을 사전에 예습(?) 했기도 했었다.
‘하얼빈’은 김훈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암살(독립전쟁)에 대하여 일본인 법관들이 작성한 신문조서와 공판 기록을 기반으로 쓴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실제 사실을 따라가면서 안중근과 그 주변 인물들의 내면의 흐름을 엮어가는 방식의 글 이었다. 암살 당시의 일대기를 읽는 느낌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의 행동과 내면의 흐름까지도 책에서는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우라지(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함께 암살을 결심하게 된다.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암살을 계획하나 러시아 헌병대에 구금되어서 실패하고 안중근 의사께서는 암살에 성공하신 이야기이다.
암살이후 일본의 취조 과정과 재판과정, 그리고 사형을 당하시기 까지의 과정을 담담히(?) 적어가고 있다.
김훈 작가의 글답게 아주 적확한 표현으로 상황을 그리고 내면의 흐름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일제 식민지배를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독립 의병들의 지난한 항일 투쟁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를 그대로 받아 들일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행동을 요즘 시대상황의 잣대(?)로 달리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을수는 있지만
현재의 잣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하신 분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폄훼하거나 왜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놀랐던 사실은 후기에 적혀 있었다.
작가는 소설에서 감당하지 못한 사실을 후기에 적어 놓았다고 한다.
가장 안타깝고 끔찍한 사실은 안중근 의사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은 1939년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와 촉탁 아이바 기요시가 동행하여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안중근 사건 관련자들의 신문과 재판 전 과정에 통역했던 소노키 스에키가 통역을 담당했다.
1393년 10월 15일 조성총독부 관리들과 함께 이토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박문사에 참배하고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위령했다고 한다. 이자리에서 안중생은 ‘이토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다음날인 10월 16일 서울 조선호텔로 찾아가서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를 만나서 사죄하였다고 한다. 조성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삼 일간의 ‘박문사 화해극’은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 되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장녀인 안현생도 안준생이 ‘박문사 화해극’을 벌인지 일년 오개월 후인 1941년 3월 26일 남편 황일청과 함께 서울에 와서 박문사를 참배했다. 조성 총독부의 촉탁 아이바가 안내 하였고 안현생은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고 말했고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이 보도했다.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일 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일본 총독부의 계속되는 공작과 협박 등으로 인한 일이었을 것이라 추정 되기는 하지만 얼마나 진인하고 끔직한 일인지 모르겠다.
한가지 다행이라고 생각드는 이야기는 안중근 의사는 1910년 당시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서울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또한 강론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임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연대적인 책임을 느끼도 있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 12월 3일 천주교회는 대희년을 맞아 ‘쇄신과 화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하고 한국교회가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라는 입장문을 밝혔다.
1945년 이후 광복직후에 김구 선생은 여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힌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서 봉환하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특히 2006년은 남북이 함께 발굴단을 구성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유해에 대한 유의미한 정보가 없다고 한다. 1946년 7월에 김구선생의 주도하에 효창공원의 이봉창 의사 옆에 가묘를 마련하여 유해가 봉환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어서 빨리 봉환되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