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
애달프도록 익어 짓물러진 감처럼, 작가는 어딘가 시큰하고 기억에 남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1. 오래도록 책에 머물렀다. 읽는 둥 마는 둥 굴면서도 책에 새겨진 애정인지, 도무지 집에 떼놓고 다닐 수 없어 외출의 기회에는 늘 이 책이 함께했다. 그러다 보니 갈피 없이 조금씩 읽은 내 습관을 티 내듯, 책의 여러 부분이 조금씩 닳아 괜스레 안쓰러워 보였다.
시인의 사랑이 그랬다. 무더기의 사랑을 대가 없이 바치는 사람, 딱딱하고 무딘 글자로 책을 엮어내도 읽는 이에게 총 천연의 사계절을 보여주는 사람, 오랜 세월의 경험을 짧은 세월의 사람에게 입힐 수 있는 사람으로 시인의 사랑은 읽혔다. 그렇게 책 속에 입혀놓은 사람과 사랑이, 꼭 이곳저곳 닳아 헤진 책의 모습과 비슷해 묘한 친밀감을 주었다.
2. 여행 산문집으로, 제주도나 해외 등 시인에게 깊게 남은 장소들이 자주 나온다, 그중에는 이름 모를 마을의 큼지막한 나무도, 빌려놓은 제주도의 작업실도 크기를 함께한다. 크고 작음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든 장소들을 소중히 여기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두려워 혼자서는 발 한번 담궈보지 않았던 여러 나라들, 코앞이어도 선뜻 눈길을 주지 못했던 작은 순간들에 시인의 사랑이 가득하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 떠난 여행길에서 얻어먹는 밥이나, 남의 슬픔에 자신을 덧입혀보고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작은 오지랖을 부리는 할아버지는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아직도 세상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3. 온기와 함께 냉기도 있었다. 드문드문, 책의 중간중간에 유독 차갑게 읽히던 몇 구절들이 있었다. 따뜻한 볕의 지하에는 차가운 지하수가 흐르는 탓일까, 그토록 사랑으로 새겨놓은 글귀들 속에도 크지 않은 한기가 군데군데 새겨져 있었다.
“ 설령 그 사랑을 이룰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이라는 우주 안에 영원히 떠돌며 자라는 것이 사랑 ” 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의 사랑에는 길었던 겨울이 있고, 뜨거웠던 청춘이 있으며, 돌아와 잠잠해지는 가을과 봄도 있다. 그렇게 시인은, 사계절을 품에 안고 산다고 느꼈다. 괜스레 마음에 가벼운 것들만 담아 넣고 사는 내가 조금 부끄럽게도 느껴졌다.
4. 자유로운 여행이 주제라서 그렇게 느꼈을까, 책 속에 담긴 표현들은 하나같이 둥지를 틀고 살지 않는 새같이 자유로웠다. 툭 치면 어디로든 날아갈 듯 위태롭기도, 어딘가에 묶여 살지 않는 드넓은 초원의 말 같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의 표현력 때문일까, 그저 시인이 새도, 말도 되어보았기에 이렇게 체감하는 걸까.
- 여러모로 각박한 세상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얼굴 하나 모르는 세상, 사람의 직업과 연락처는 알아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하나 모르는 세상이 지어졌다. 이런 지붕 밑에 사는 지금의 사람들은, 마치 사랑을 피하려 드는 것 같아 괜스레 나도 호감과 친밀함을 접어 넣지만, 마치 내가 사랑했던 세상을 돌려준 것 같아서 이병률 시인의 책은 내게 큰 의미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