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 나는 인간의 유전자에서 배양되었고, 너나 민이는 인간의 설계대로 제작됐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생에 대한 집착도 함께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생각해.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그런데 민이는 아직 아니야.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선이는 옳았다. 훗날 때가 왔을 때, 선이도 나도 일말의 의심없이 알 수 있었다. 끝이 우리 앞에 와 있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내가 기계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인간처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아침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꿈이라는 가상현실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뜨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는 어디일까? 오늘은 언제일까? 질문들이 이어지고 나의 뇌가 그 답을 준비하는 시간.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라는 자각이 찾아왔다. 그 자각은 분노로 이어졌다. 잠이며, 꿈이며, 온갖 번거로운 인간다움에 대하여 나는 화가 났다. 스위치가 있다면 찾아서 수면과 관련한 기능을 꺼버리고 싶었다. 인간을 흉내내기 위해 굳이 집어넣은 이 치명적인 취약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구상의 동물들은 어째서 잠이라는 기능을 가진 형태로 진화한 것일까? 나는 이십사 시간 깨어 있고 싶었다. 어차피 기계인데, 차라리 기계의 좋은 점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압화도 없었다. 아마도 아빠는 내 내부에 필멸의 타이머도 내장시켜놓았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특정한 나이가 되면 죽을 수 밖에 없도록. 그래야 진짜 인간처럼 삶에 대한 갈망으로 몸부림칠 테니까, 수명 연장의 헛된 희망으로 온갖 멍청한 짓들을 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이 달마가 꾸며낸 일은 아닐까 의심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