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내용 발췌
만약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대단히 지능이 뛰어나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뇌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뇌세포들이 일부 손상되었고, 그 때문에 성격이 친절해졌지만 대신 음악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지능도 평범한 수준의 사람이 되었다. 만약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 유령으로 변하게 된다면, 그 유령은 어릴 때 성격과 지능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머리를 다친 이후의 성격과 지능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일까? 원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모습으로 활동하는 것이 유령 세계의 규칙이라고 해야 할까? 나이가 많이 들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심장이 멎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몸이 쇠약해져 별다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별다른 행동도 할 수 없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다수의 유령은 그냥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병석에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일 뿐이어야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목격한 저승사자의 모습은 검은 한복에 검은 갓을 쓰고 있고 얼굴은 창백한 남성인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이 그것이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목숨을 잃으려고 할 때 찾아오는 저승사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전설이나 옛이야기에 나오는 그 저승사자가 실제로 내 꿈속에 나타나 누구인가의 생명을 빼앗고 죽음의 세계로 데려간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사실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이 창백한 저승사자의 모습은 먼 옛날부터 내려온 한국 저승사자 모습의 대표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유행했던 KBS 〈전설의 고향〉에서 저승사자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상식 PD와 제작진이 개발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럴듯해 보였고 시청자 반응도 좋아서 최상식 PD를 비롯한 제작진은 그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가면서 계속 활용했고, 그런 방송이 몇 차례 TV에 나오는 사이에 무심코 한국의 전통적인 저승사자는 저런 모습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다 된 괴담에 ‘화학’ 뿌리기
초자연현상 뒤에 있는 화학의 세계
괴담과 화학이 만났다. 귀신은 해병대만 잡는 게 아니다. 저자는 유령 잡는 화학자가 되어 괴담의 허점을 찌른다. 예를 들어 흉가에 머물 때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자기 몸이 아픈 것은 그 집에 머무는 귀신의 괴롭힘 때문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집에 잘 생기는 ‘독검댕곰팡이’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인형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인형에 악령이 들린 것이 아니라 ‘열팽창’ 때문이라든지, 학교 미술실에만 가면 귀신을 본다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환기가 잘 안 되는 작업실 특성상 본드 중독의 증상으로 환각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곽재식 박사의 기발한 상상력과 박학다식함은 이 책의 큰 무기이다. 다루는 소재가 익히 들은 괴담이나 구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나 대중매체, 옛 설화집의 이야기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로마 황제들이나 홀린 듯이 춤추는 유럽 각지의 무도광 현상 같은 역사적 이야기를 통해 각각 수은 중독과 맥각병에 걸린 곡물 섭취가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한다. 악령 들린 인형을 다룬 영화 〈애나벨〉 시리즈, 제3의 눈으로 불리는 송과선 비슷한 장치를 만드는 내용의 영화 〈지옥인간〉과 같은 공포 소재를 다룬 대중매체와 《어우야담》, 《용재총화》 같은 조선시대 옛 설화집 속 이야기를 엮어 설명하는가 하면, 코팅리 요정 사건, 최초의 강령술사 폭스 자매 사건 등 화제가 되었던 실제 미스터리 사건들도 다수 다루어진다. “궁금하잖아요. 안 궁금하세요?”를 외치던 곽 박사의 번뜩이는 눈빛만큼이나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괴담 마니아뿐 아니라 과학 마니아들의 지적 호기심도 채워줄 것이다.
어른이 되어도 귀신은 무섭다?
이제는 밝고 정확하게 세상을 보자
핼러윈이 되면 도심 곳곳에는 각종 유령 분장을 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금은 축제처럼 즐기고 있지만, 그 유래 역시 초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더 나아가 보지 않은 것을 본 것처럼 믿게 만든다. 예를 들어, 저자는 1970년대에 바이킹 탐사선이 화성 시도니아 지역에서 찍어 보낸 사진을 소개한다. 화성의 바위 일부분이 사람의 얼굴 형상과 비슷해 보여 당시 큰 화제였는데, 사람들은 화성에 외계물체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식의 가설을 쏟아냈다. 이처럼 우연한 모양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현상을 ‘파레이돌리아’라고 부른다. 바람이 불어 닫히는 문소리를 악령의 목소리로 착각하는 것이나, 나무에 걸린 하얀 비닐을 소복을 입은 귀신으로 보는 것, 인터넷에서 떠도는 심령사진이 우리에게 오싹한 느낌을 주는 것도 모두 이 현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검은 옷을 입고 갓을 쓴 저승사자는 어떤가? 우리가 쉽게 떠올리고 많은 사람이 실제로 목격했다고 증언하기도 하는 저승사자의 전형적인 모습은 저자에 따르면 사실 〈전설의 고향〉의 제작진이 만들어낸 것이다. 옛사람들이 생각한 저승사자는 이와 다른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저승사자는 갓을 쓰지도 않고 울긋불긋한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기억은 생각보다 더 정확하지 않고 착각이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등장해온 초자연현상들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일 뿐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저자가 괴담을 폄하하거나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괴담은 괴담대로 재미있고, 괴담에 대한 해석도 그 자체로 즐기면 될 뿐이다. 이 책이 막연한 두려움의 정체를 벗겨 밝고 정확하게 세상을 보는 데 유쾌한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