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유교가 지배하는 사농공상의 나라인가?
그 말은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선비라고, 양반이라고 해서 경제활동을 하지않은 것이 아니었고
더 잘 살기 위해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기도 했으며 고리대금업을 하며 부를 쌓기도 했다.
조선의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와 다를바 없이 더 잘 살아보고자 돈을 쫓아 부동산에 열광하며
더 많은 부를 모으고자 했으며 자식들을 인 한양시켜 공부시키고자했다.
더 많은 부를 모으기 위해선 임금이 사는 한양에 살아야했다.
그래야 더 많은 정보와 기회가 있었고 자식들에게도 수준높은 교육을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한양안에 내 집 한칸 마련하고자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모두 애를 썼다
인 서울의 꿈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조선시대의 '인 한양'의 열망은 지금 우리들의 '인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이 살고있는 한양에 살아야 과거시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고,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며 고위층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너나 할것없이 많은 이들이 인 한양하고자 했고
그 결과 한양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주택이 부족해졌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한양의 집값은 지금의 집값과 별반 다르지않았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그때도 기왓집 한채가 10억이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한양은 지금의 서울과 달리 사대문 안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계속된 인구의 유입으로 주택은 턱없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지방러가 과거에 합격해 상경해도 머물곳이 마땅치 않았다.
방 한칸에 칸막이를 설치해 여러칸으로 나눈 셋집에서 살아야했고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들은 한양의 노비의 집에 세들어 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한양의 상황은 지금 서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쪽방촌 기사나 부동산 가격의 폭등, 전셋값 상승 등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정약용 또한 한양 안에 집을 마련하고 살기를 원했다.
자식들을 한양안에서 살게 하고싶어했으나 결국은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안전한 환경에서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살고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몰려사는 치안이 좋고 여러가지 인프라가 구성되어있는 한양에 살려고 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