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비전을 통해 평소 읽기를 주저하던 '사피엔스'를 완독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도 압박이지만, 학교에서는 거시사를 공부하고 평소에는 미시사에 흥미를 느끼는 나로서는 재직중에 빅히스토리 담론을 이끄는 이 책을 손에 집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빅히스토리 담론은 진화생물학 등의 분과학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만큼 책을 읽으며 나의 무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울까 여러번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빅히스토리 담론을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읊는 이 책이 나의 무지를 포용할 수 있을뿐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을 일깨워준다는 점을 알았다.
진화론적 우연에 기반한 언어 능력, 언어를 이용한 사피엔스 간의 협력과 이를 통한 허구의 산물인 화폐, 종교, 제국의 발생을 볼 때 이 책은 호모사피엔스의 생존과 진화에 우연성 및 대상의 신화화가 필수였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부여받은 직무, 월급으로 받는 돈, 그리고 우리에게 돈을 주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 모두 사피엔스 간의 암묵적 합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신화의 산물인 것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헤겔이 말한 개인의 정념이 '이성의 간계'에 따라 '국가'라는 이성적인 존재를 이룬다고 한 것과 언뜻 일맥상통해보인다. 다만 헤겔에게 있어 역사는 이성의 핵심인 자유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인 반면, 과학적 관점을 견지하는 글쓴이에게는 인류의 역사는 아무런 의미없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일 뿐이다.
또한 인간의 행복은 우리가 받는 월급, 직장동료와의 관게, 직급 등 외부 변수 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과연 진짜일까?) 그보다 우리의 신경, 세로토닌, 도파민 등 생화학 물질에 의해 인간의 행복이 결정되며,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유발하는 외부 자극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생화학물질들의 수준까지 바꾸지 않았다. 즉, 과거 수렵인들이 길을 가다가 맛 좋은 열매를 발견했을 때 행복도와 우리가 월마다 급여를 받을 때 행복도에는 별 차이가 없다.(오히려 현인류가 스트레스는 더 많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가 어떠한 발전 의도도 가지지 않고, 현인류가 과거 수렵채집인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있다고 볼 수 없다면 인간은 역사에서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부분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 질문이며,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가장 큰 소통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니체처럼 사피엔스의 진리인식과 행위가치규범 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글쓴이에 따르면 인간은 사피엔스 종으로서, 단지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을 읽을 다른 분들도 사피엔스의 진화 과정을 밟아가며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