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 공국은 10~20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의 종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침략 등으로 키예프는 쇠퇴하고 말았고, 소위 분가에 해당되는 모스크바가 대두하여 슬라브의 중심은 여기로 옯겨졌다. 루스(모스크바)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나라를 나타내기 위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역사상으로도 키예프 루스 공국은 우크라이나인의 아라가 아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발상의 나라로 받들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 모스크바에서 발흥한 나라가 훗날 대국이 되어 자국을 러시아로 명하고, 키예프 루스를 잇는 정통 국가라고 자성하며 나섰기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나라없는 민족의 역사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 공국 이래로 쌓여온 러시아의 역사 문헌은 그 양이 매우 많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수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 있었다. 고골은 코사크에의 후예이자 순수 우크라이나인 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조부는 우크라이나 코사크 출신이며, 도스옙스키의 선조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한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세르게이 코롤료프 역시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 우크라이나에는 역사와 문화, 과학기술이 존재하는데도 이 모든 것이 러시아, 소련의 역사와 문화, 과학기술에 포함되어 그 영예마저 러시아, 소련에 귀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세계 속에서 러시아, 소련 내부에 있는 곡창지대로만 알려졌다.
우크라이나는 나라가 없다는 큰 결점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언어와 문화 및 관습이 매우 유사한 대국 러시아를 이웃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관습을 키워갔다.
우크라이나는 코사크 시대의 독창적인 역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병합된 후에도 러시아 역사 속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우크라이나의 내셔널리즘은 점점 고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크라이나는 1991년에 독립을 맞이했다. 독립 후 사람들은 아직도 유럽에서 이런 대국이 나올 여지가 있었느냐며 매우 놀라워했다.
국토 면적은 일본의 약 1.6배로 유럽에서는 러시아에 이어 두번째로 크다. 독립 당시의 인구는 5,200만명으로 러시아,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의 뒤를 이었고, 스페인과 폴란드의 인구수를 훨씬 웃돌았다. 이렇게 유럽에서 5,000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국가가 성립한 것은 19세기 후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산업으로는 먼저 농업을 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작지 면적은 거의 일본의 총 면적에 이르고, 농업국 프랑스 경작지 면적의 2배나 된다. 그래서 만약 21세기에 세계적 식량 위기가 일어난다면 그 위기에서 구해 줄 나라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를 꼽을 정도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단순히 유럽의 곡창이기만 한게 아니라 대공업 지대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흔히 구 소련의 첨단 기술이 모두 러시아로 계승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예를 들어 SS-19나 SS-21과 같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우크라이나에서 만들어 졌다.
예술 및 문화, 스포츠 분야의 수준도 상당히 높다. 특히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스바토슬라브 리흐테르 등의 음악가를, 발레 무용수인 바츨라프 나진스키,아방가르드 회화의 창시자 카지마르 밀레비치 등을 탄생시켰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장대 높이뛰기 선수 세르게이 부브카, 피겨스케이팅 선수 옥사나 바울 등을 배출시켰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제국의 붕괴와 함께 마침내 샘처럼 지표면에 드러났다. 현재는 세계 각지에서 우크라이나의 발견, 우크라이나의 복권이라고 부를 만한 움직임마저 일어나고 있다. 유럼과 미국은 러시아와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여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유럽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