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을 잃지 않는 다른 모든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선의 기원은 신화와 전설 속에 가려져 있다. 모든 변화는 불교의 창시자적인 석가모지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염화미소. 한 송이 꽃과 미소에서 선이 시작됐다는 이야기는 합당해 보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선의 생명력은 역사적인 사실성을 따지는데 있지 않다. 누군가가 지어냈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에는 꽃이 웃으면서 다시 웃음이 꽃핀다는 선의 본질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선禪 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 어 '쟈나Dhyana'의 음역이긴 하지만 인도의 '쟈나'와 중국의 '선'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쟈나'는 정신을 모으는 여러 절차를 담은 명상법을 뜻하는 반면, '선'은 중국의 선사들이 파악했던 대로, 느닷없이 현실의 본모습을 바로 보게 되는 일, 혹은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일이 핵심적이다.
대승 불교가 가져온 광범위한 충격으로부터 선종의 활력이 시작되었다. 선이라는 형태로 노장 특유의 통찰을 그대로 되살리고 발전시키게 된 원인은 대승 불교의 충격 때문이었다. 장자의 사상과 정시을 진정으로 이어받은 사람들은 당나라 때의 중국 선사들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선사들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노장과 일치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한 존재의 중심에 깊이 가닿을 수 있는 내적인 지각 능력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는 <장자>에 나오는 ‘마음을 삼감心齊’, ‘완전히 잊음坐望’, 꿰뚫어 봄朝徹‘에 해당한다. 이 사실이 맞다면 이는 장자의 중심 사상이 선의 핵심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의 사상은 순수한 통찰로 남은 반면, 선에서는 이 통찰이 ’가장 중요한 수련‘이 되었다는 점이다.
선은 서로 비슷한 불교적 직관과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적 열정의 힘을 도교와 접목시켜 한껏 발전시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로 본다면, 이 엄청난 아이의 어머니는 바로 도교다. 그렇지만 이 아이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