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전생 아니면 내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베르베르는 주인공 르네의 입을 통해 지금의 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틀란티스인 게브는 물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병, 고성(古城)에 사는 백작 부인, 고대 로마의 갤리선 노잡이, 캄보디아 승려, 인도 궁궐의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까지……. 르네가 문을 하나 열 때마다 다양한 시대, 다양한 나라에서의 삶이 펼쳐진다. 그러나 기억의 문 뒤에는 보물과 함정이 공존하고 있다. 르네는 전생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속도감 넘치는 예측 불허의 모험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공연을 진행하는 최면사 오팔은 관객들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인간의 정체성에서 기억이 어느 만큼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기억을 만들고 지켜 나가는지가 이 작품의 화두다.
르네는 일상 생활에서는 건망증이 심해서 하던 이야기도 까먹을 정도지만, 최면을 통해 보통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심층 기억에 도달한다. 르네의 직업이 역사 교사인 것도 의미심장한데, 역사는 다시 말해 집단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르네의 아버지 에밀은 알츠하이머 때문에 점점 기억을 잃어 가는 반면, 최면사 오팔은 기억력이 지나칠 정도로 좋아서 괴로워한다. 그 외에도 『기억』의 등장인물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기억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기억을 어떻게 대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접하여 소설이 재미가 한층 더 깊은 느낌을 받은 것같다.
주인공 르네 톨레다노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그는 센강 유람선 공연장 〈판도라의 상자〉에 갔다가 퇴행 최면의 대상자로 선택당한다. 최면에 성공해 무의식의 복도에 늘어선 기억의 문을 열 수 있게 된 르네. 문 너머에서 엿본 기억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그의 전생이었다. 최면이 끝난 후에도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한 기억에 시달리던 그는 몸싸움에 휘말려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할지 말지 고민하며 초조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또 다른 실험에서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피험자들을 디즈니랜드로 데려가 구경시켰다. 그러고 나서 감상을 물어보면서 만화 영화 주인공인 벅스 버니와 보낸 시간이 즐거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벅스 버니는 디즈니 만화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경쟁 스튜디오인 워너 브라더스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디즈니랜드에서 마주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험자의 60퍼센트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와 악수를 했다고 기억했고, 50퍼센트는 벅스 버니를 안아 봤다고 기억했으며, 한 명은 심지어 토끼가 들고 있던 그 유명한 당근을 빼앗았다 다시 돌려준 기억이 있다고 응답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 개인은 아무 생각 없이 집단의 선택을 따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죠. 하지만 동화되고 싶어 무조건 남들과 똑같이 하려는 것은 무척 해로운 발상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시스템으로 편입되면 우리는 집단적인 유권자이자 소비자로 만들어질 뿐이니까. 나는 여러분을 똑똑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고 싶단 말입니다. 젠장,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가 어렵나? 그게 바로 교사인 내 역할이에요. 여러분을 고양시키는 것. 다시 말해 여러분의 의식 수준을 높여 주는 것 말이에요. 기껏 여러분을 노예로 만들 졸업장을 따게 해주는 것 말고.」 이번에는 학생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는 걸 보고 르네는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나는 그들에게 증오를 느끼지 않아요. 그들은 내가 지닌 저항의 힘을 깨닫게 해주니까요. 그들은 내가 누군지 더 잘 알게 해주죠. 게다가 이 일로 당신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전에는 내게 환생이 모호한 개념에 불과했지만, 이제 당신이 내 뒤에 온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지만 당신은 죽을지도 몰라요!」
피룬은 자신의 느낌을 이런 표현으로 르네에게 전달한다.
최면과 전생, 아틀란티스라는 소재를 빌려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기억』의 상상력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여전히 젊은 작가임을 확인시켜 주면서 우리에게 또 한 번 소설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