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지구가 멸망한다면 어떻게 멸망할 지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자주 공상하던 버릇은 나이가 들어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라졌기에, 오랜 시간 머리를 쥐어짜보아도 영화나 소설에서 흔하게 써먹는 것들뿐이다. 김초엽 작가의 작품 《지구 끝의 온실》에서는 ‘더스트폴’이라는 무한 자가증식하는 나노봇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지구 멸망이 시작된다는 새로운 접근의 멸망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매우 새롭지만, 지구 멸망이라는 것은 결코 단 한순간도 반갑지 않은 이야기이긴 하다.
책을 읽다보면 계속하여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책 속의 세상을 비교하게 된다. 현대사회는 모두가 행복하고 이상적인 세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딜봐도 멸망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나타나면서 전세계 국가에서 마스크를 쓰게 되는 재난상태가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는 멸망은 커녕 오히려 자연스럽게 위드코로나 화 되면서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다. 책속의 더스트폴과 코로나는 닮은 구석이 많다. 그것이 기계나 아니냐 등의 차이를 무시하면, 계속해서 인류를 괴롭히는 아주 작고 무시무시한 녀석들이다.
한명의 독자를 떠나 남자로서 페미니즘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을 만났다. 작품에서 나오는 남자들은 전부 못 된 녀석들뿐이다. 작품 속 인류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만든 돔시티에 들어가지 못한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속한 자들이 작품의 중심인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더스트 폴을 이겨내고 재건에 성공한 인류의 등장 속에서도 끝내 착하고 멋진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 속 설정처럼 인류가 멸망하던 더스트 시대에서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작품 속 악당 역할을 주로 맡은 나쁜 남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남자들이 대체로 나쁘다는 것일까? 아니면 남자들이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나쁘게 변했다는 것일까. 반대로 이타적인 수많은 남자들이 나쁜 사람들과, 그리고 여자들, 어린아이들, 노인들, 장애우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희생했기 때문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은 그저 상상 속에만 국한된 미래가 아니다. 인류의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나노 봇의 등장은 머지않아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마블의 아이언맨처럼 나노봇을 지구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통제력을 상실한 과학기술은 분명 인류를 위협할게 자명하다. 무수한 SF 작품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된 상상하기 싫은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기계나 바이러스 등으로 인한 문제 발생 가능성이 낮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안도할 수 있게 대부분의 작품들은 희망과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식으로 장식하지만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결과일 뿐인 것이다. 결국 인류가 처한 시련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고, 재건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 대부분은 죽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러다이트 운동처럼 극단적인 방식은 지양하더라도 세계 선도 기술을 확보하고 개발하는 기업과 연구소들은 업무를 행함에 있어 항상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도 스스로 급작스러운 변화가 생길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현실적인 이타주의를 가지고 있다면 작품 속 모스바나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우리는 책 속에서 우리 현실과 계속해서 마주하게 된다. 1년 넘게 지속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시대 속에서 지구는 나라별로 빗장을 치고, 국내에서도 서로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항상 마스크를 끼고 있다. 이 바이러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팬데믹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 각자 노력했고, 아직 이겨냈다고 말하기엔 이르지만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스트와 코로나의 심각성은 차치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이타적인 행위들 덕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유례없는 고난 속에서도 이 시국을 이겨낼 수 있다는, ‘모스바나’의 푸른 빛처럼 빛나는 희망을 계속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