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는 고등학교때 한번 읽어보고 올해 다시 읽게 되었다.
내용은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지만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기억은 있다.
그런데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었을때는 충격을 넘어 가히 공포감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내가 관심있는 사항은 아이를 양육할때 허용과 통제의 적절한 간극을 찾는 것이다. 그 간극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때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멋진 신세계의 서두에서 바로 내가 고민하던 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허용과 통제의 적절한 간극을 찾는것, 물론 나와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말이다.
이 책에서는 과학의 눈부신 성장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결국 획일화의 길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한개의 정자와 한개의 난자가 만나 우주에서 하나뿐인 아주 특별한 인간이 태어나는 그런 것은 효율화의 측면에서 비극으로 치부되었다. 여러개의 세포로 갈라져서 모체 내에서 성장하지도 않고, 필요에 따라 뇌를 포함한 장기를 발달시키기도 하고 퇴화시키기도 하면서 공장식 양육이 자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도 부모의 양육이 아닌 전문 보모에 의해 길러졌고, 장래의 정해진 미래에 필요한 기능만을 키워가면서 길러지게 된다.
인간성과 인격체의 성장의 완벽히 무시해버리는 이 시스템이 나는 너무 무서워졌고, 1930년대에 쓰여진 글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이 글이 쓰여진 방향으로 과학이 발전하고 있는것 같아 두려웠다.
개인적으로 4차산업혁명과 AI, 로봇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여도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육아'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태어난 기질의 차이가 물론 있겠지만 사람들이 육아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쏟는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갈등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갈등이 자꾸만 해결되지 않는다면 결국 멋진 신세계에서 말한 사회의 모습이 진짜로 구현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우 공포스럽고 충격적이었지만 자꾸만 생각해볼 거리를 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