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공공기관의 틀 안에서 일하며 내 삶은 늘 규정과 지침, 그리고 해마다 반복되는 사업 계획의 주기에 맞춰 흘러갔다. 눈앞에 산적한 보고서를 처리하고, 효율성과 신속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짧은 글과 요약 정보에 익숙해진 요즘, '독서'마저도 가성비를 따지고 있는 내 모습을 문득 발견했다. 그러던 중 『살면서 한번은 벽돌책』이라는 제목은 묘하게 내 마음을 붙잡았다. 수백,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압도적인 두께 때문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른바 '벽돌책'들을 향해 나직하게 말을 건네는 이 책을 보며, 나 역시 내 삶의 두께를 돌아보게 되었다.
50대라는 나이는 인생의 하프타임을 지나 완숙기를 향해 가는 시기다. 직장에서는 중책을 맡아 늘 긴장감 속에 살아가고, 가정과 사회에서도 책임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나이가 되면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는 것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깊이 있게 되새기고 삶의 중심을 단단히 잡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살면서 한번은 벽돌책』의 저자는 바로 그 지점을 짚어준다. 왜 우리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무겁고 고전적인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그 행위가 우리의 내면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차분하게 설득한다.
책을 읽는 내내 공공기관에서 보낸 나의 지난날들이 겹쳐 보였다. 단기 성과와 효율성에 쫓겨 우리가 놓쳐버린 수많은 가치들이 떠올랐다. 벽돌책을 읽는다는 것은 효율성의 극단을 달리는 현대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비효율'을 선택하는 행위다. 빠르게 결론만 찾아가는 요약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저자의 사유를 끈질기게 따라가는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과도 같다. 이 책은 단순히 '어려운 책을 읽는 법'을 알려주는 기술서가 아니다. 오히려 속도전 같은 삶에 지친 이들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깊이 생각해도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는 인문학적 고백록에 가깝다.
특히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벽돌책들의 면면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젊은 시절, 제목만 듣고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던 고전들이 나이가 든 지금에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20대의 치기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인간의 고뇌, 역사적 거대 담론, 그리고 삶의 모순들이 50대의 눈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입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에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겪고, 조직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쌓인 나만의 '인생 데이터'가 거대한 고전들과 마주했을 때 일으킬 스파크가 기대되었다.
이 책이 제시하는 '벽돌책 격파법' 역시 무척 현실적이고 다정하다. 하루에 단 몇 페이지라도 꾸준히 읽는 것의 힘,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활자를 눈에 담아내는 끈기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는 마치 공공기관에서 거대한 국책 과제나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매일 조금씩 벽돌을 쌓듯 묵묵히 진행해 나가던 우리의 업무 방식과도 닮아 있다. 결국 삶도, 업무도, 독서도 본질은 같은 궤도 위에 있는 셈이다.
이제 나는 퇴근 후 스마트폰을 뒤적이는 대신, 서재 한편에 오래 묵혀두었던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들려 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며 내 영혼의 뼈대를 단단하게 세우기 위한 독서다. 『살면서 한번은 벽돌책』은 나에게 그 두꺼운 문을 열 수 있는 용기와 열쇠를 쥐여주었다. 속도의 시대에 방향을 잃지 않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모든 동년배 직장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두께만큼, 이제는 책의 두께를 즐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