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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소설)
5.0
  • 조회 0
  • 작성일 2026-05-28
  • 작성자 송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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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된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당신을 잃고 몇 해가 지난 뒤, 두 개의 필름 조각을 통해 해를 올려다 본 적이 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정오가 아니라 오후 여섯 시에, 엷은 산을 부은 듯 눈이 시어 나는 오래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웠을 뿐입니다. 내 곁에 앉아있지 않은 당신의 손등이. 연할 갈색 피부 위로 부풀어오른 검푸른 정맥들이.
이제 당신은 아이를 안고 어두운 성당에서 걸어나옵니까. 입구의 경비원에게 맡겨놓았던 유모차를 찾아 아이를 태운 뒤 버클을 채웁니까. 열일곱살의 내가 새벽부터 어리석음과 번민 속에 서성이던 그 거리를, 자잘한 검은 돌들이 박힌 포도룰 통과해 걸어갑니까. 유모차 바퀴가 불쑥 튀어오를 때마다 아이의 가슴 앞으로 손을 밀어 달랩니까. 선하기에 슬퍼하는 당신의 신을 어깨에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적 속에서 나아갑니까.
그곳은 이곳보다 일곱시간 늦게 해가 뜨지요. 이제 멀지 않은 날에, 내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필름조각들을 꺼내들 때 당신은 새벽 다섯시의 어둠 속에 있겠지요. 당신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타오르며 글썽이던 두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따금 흔들리겠지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카페와 식당에서 그녀는 스스럼없이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서건 누구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른 체구였지만, 자신의 부피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어깨와 등을 웅크렸다. 그녀는 유머를 이해했고 퍽 낙천적인 미소를 가졌지만, 웃음소리만은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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