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을 훔치는 위험한 취미, "취미는 사생활"을 읽고
인생을 살며 나는 줄곧 '내방', '내 공간'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어릴적 가끔 부모님이 노크 없이 방문을 열거난 내 노트 등을 슬쩍 보려고 하실 때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확 속구치곤 했었다.
나만의 비밀, 나만의 생활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즉 '사생활'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권리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집에서, 그것도 이웃집 사람에게 내 사생활을 통째로 해킹당하고 마침내 내 인생까지 빼앗기게 된다면 어떨까?
장진영 작가의 소설 '취미는 사생활'은 바로 이런 끔찍하고도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하이퍼리얼리즘 서스펜스라는 장르로 그려낸 작품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미스터리 소설인 줄 알고 펼쳤다가,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이야기는 아파트 2202호에 사는 주인공 '나'와 바로 윗집인 2302호에 사는 '은협'이라는 두 여자가 우연한 만남으로 식작된다. 은협은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전세살이의 불안함을 늘 안고 사는 평범한 주부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한파 속에서 남편의 옷장을 뒤지던 은협은 고가의 여성용 명품 구두를 발견하고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을 품게 된 은협은 아랫집 여자인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두 사람은 남편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남편이 숨겨둔 비밀의 방에서 발견된 것은 불륜의 흔적이 아니라, 여성 물품을 기괴하게 수집해 놓은 남편만의 은밀한 취미 공간이었다. 이 충격적인 불행을 함께 목격하면서 은협은 '나'를 완벽한 내 편으로 믿고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은협에게 찾아온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인생을 통째로 집어삼킬 덫의 시작이었다
소설 속에서 가장 소름 돋았던 부분은 '나'가 은협의 삶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은협의 골치 아픈 일들을 대신 해결해 주겠다는 핑계로 '임시 은협'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은협을 대신해 아이의 학교에 가서 학부모 상담을 받고, 전세 계약 만기를 앞둔 집주인과 대신 협상을 벌이며, 아파트 동대표를 상대할 때도 자신이 은협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웃 주민들은 진짜 은협의 얼굴을 잘 몰랐기에 세련되고 당당하게 일처리를 하는 '나'를 진짜 은협으로 믿어버린다. '나'는 은협의 옷을 입고, 은협의 말투를 흉내 내며 진짜 주인의 자리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뒤늦게 은협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발버둥 치지만, 이미 이웃들과 주변 사람들은 진짜 은협을 '육아 스트레스로 미쳐버린 여자'로 취급할 뿐이었다. 결국 은협은 남편과의 신뢰도 깨지고, 자식들에게도 엄마로서의 자리를 잃고, 전셋집에서마저 쫓겨나며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지워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두 가지 면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는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진 서늘함이다. 우리는 대단지 아파트에 모여 살지만, 막상 옆집이나 윗집에 누가 사는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소설 속 주민들이 진짜 은협과 '나'를 구별하지 못했던 것도 이웃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작가는 현대 사회의 아파트가 이웃사촌이라는 친밀함의 공간이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속에서 언제든 타인의 신분을 훔칠 수 있는 단절된 공간임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또한 '자가'와 '전세'라는 신분에 따라 주거 불안을 겪는 은협의 약점을 파고드는 '나'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부동산에 대한 집착과 불안이 인간을 얼마나 취약하게 만드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제목이기도 한 '사생활을 소비하는 욕망'에 대한 경고다. 소설 속 '나'에게 타인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지배하는 것은 단순한 오지랖을 넘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비틀린 '취미'였다. 문득 소설을 읽다가 스마트폰을 켜고 SNS를 서핑하는 나의 모습이 겹쳐 보여 뜨끔했다. 우리는 매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타인의 일상과 사생활을 훔쳐보고, 그것을 평가하고 소비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소설 속'나'처럼 타인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취미를 조금씩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선을 넘어서 타인의 삶을 가스라이팅하고 파괴하는 순간, 그것은 범죄이자 괴물이 되는 것이다. 은협의 인생을 단물만 쏙 빼먹듯 망가뜨리고, 또 다른 타인의 사생활을 찾아 유유히 떠나는 '나'의 마지막 미소는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취미는 사생활"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현대인의 외로움과 비틀린 욕망, 그리고 주거 불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훌륭하게 엮어낸 수작이다. 나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던 가족, 집, 이름이라는 정체성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며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내 방 문을 닫는 것만으로 내 사생활이 완벽히 보호된다고 믿었던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벽이 아니라 타인과의 건강한 거리감과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고마운 책이다.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참견하거나 반대로 이웃에게 너무 무관심한 사람들, 그리고 SNS 속 타인의 화려한 사생활에 쉽게 휩쓸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꼭 한번 읽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