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 타이완 여행기(양솽쯔)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닌 여행기 형식을 띈 소설이다. 마지막 번역 후기를 읽기까지 허구와 진실을 오가며 어디까지가 소설인지에 대해 헷갈리기도 했는데 결론은 번역 후기 이전 역자 후기마저도 소설이었고 작가는 아주 정교한 방식으로 독자를 속인다.
이 소설의 형식을 보면 1900년대 초 일제 강점기에 한 일본인 여류소설가(아오야마 치즈코)가 1년간 타이완에 체류하며 연재했던 여행기를 소설로 다시 썼고, 이를 양솽쯔라는 타이완 번역가가 발견해 번역 및 출판했다는 설정으로 집필되었다. 초반에는 타이완에서 먹는 음식을 매개로 타이완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게 되고 가장 큰 조력자이자 통역가인 왕첸허(샤오첸)과도 우정을 쌓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스토리의 주요 흐름으로 보여졌다.
아오야마 치즈코는 본인이 쓴 소설의 영화제작으로 인기가 올라감에 따라 타이완 총독부와 현지 부인 단체의 초청을 받아 타이완을 방문한다. 당시 시역소 직원 미시마의 도움을 받기로 하지만 매번 그 나라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그녀와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현지인인 왕첸허를 소개 받는다.
아오야마는 짭짤한 씨앗볶음 과쯔, 하카식 쌀국수 간식 비타이박, 황마의 어린잎으로 끓인 탕 무아인텅, 지인의 고급음식 사시미, 다진 돼지고기 조림 러우싸오, 달콤하게 마시는 차 동과차, 타이완식 카레, 마음을 나누는 음식 스키야키, 연회 후 먹는 탕 잔반탕, 새해음식 타우미, 짭조름한 케이크 셴단가오, 뤼촨의 노점에서 먹는 팥빙수를 순서로 그녀와 왕첸허가 만들어가는 관계, 음식의 맛 등을 맛깔지게 표현한다. 이렇게 스토리를 쫓아감에 따라 왕첸허의 마음도 차가운 동과차 속의 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서서히 녹아가며 둘은 친해지겠거니 예측하며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부분에 와서 왕첸허가 아오야마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사태를 맞닥뜨린다. 그리고는 아오야마 관점으로 쓰여졌던 이 모든 스토리가 얼마나 그녀의 관점에만 갖혀 있던 착각과 모순이었는지를 마지막 왕첸허의 정체가 밝혀짐과 동시에 독자도 알게 된다. 왕첸허는 어린 나이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 친구들 손에 자랐는데 명석한 그녀는 카페의 일을 보고 여러 언어를 익히고 연기도 배운다. 이름있는 집안의 서녀로서 고등교육을 받은 후 학교 선생 1년 재직 후 좋은 집안 남자에게 시집을 가기로 하지만 아오야마 치즈코는 이 똑똑하고 명석한 여자를 일본으로 데려가 커리어를 발전 시키기를 원하고 조력을 다하고자 하지만 왕첸허는 모든것을 거부한다. 왕첸허는 말 잘듣는 비서이자 통역사로서 그녀의 곁을 지킨 것이었고 모든 관계는 아오야마의 주도적인 오만의 결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요.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선의처럼 거절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도 없지요"라는 미시마의 한마디에 아오야마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관계가 얼마나 일방적이었고 더 이상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아오야마는 왕첸허를 찾아가 사과하고 일본으로 떠난 후 타이완 여행기를 써서 그녀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사망하고 그 이후 양녀를 통해 미국에 사는 왕첸허에게 도달하게 되고 자녀의 도움을 받아 자비로 이 여행기를 번역하여 출판한다.
타이완을 점령한 일본의 사람이었던 아오야마 치즈코와 점령당한 타이완의 사람 왕첸허, 둘은 한자이름은 같지만 아주 다른 위치에서 함께하게 되고 상하의 관계에서 고용인은 관대한 마음으로 잘해주고 있다고, 더 잘해주고 싶다고 끝없는 애정표현을 하지만 피고용자는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 속에서 상처받고 힘들게 그녀와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이 모습을 지켜보며 어쩌면 수많은 사회 속 인간관계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인칭 관점에서 쓰여진 만큼 아오야마 치즈코의 착각속에 만들어진 이 관계를 지켜보며 현실 속 인간들 모두 자기 착각 속에서 관계를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탈감도 찾아왔었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역자후기까지 소설이었던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나간 점으로 보아 독자를 속이는 솜씨가 아주 뛰어난 작가임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