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은퇴를 앞둔 여성 킬러 ‘조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다. 흔히 생각하는 액션 중심의 킬러 서사와는 다르게, 이 작품은 노년의 고독, 삶의 회한,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정제된 문체로 풀어낸다. '파과(破果)'라는 제목처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이미 내부가 무너진 과일처럼, 조각은 점차 삶의 균형을 잃어가며 붕괴되어간다.
조각은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인물이다. 타인을 경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며, 인간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소년 ‘동주’와의 관계를 통해,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돌보는 삶’을 경험하게 된다. 조각은 자신이 느끼지 못한 인간적인 온기와 연결을 동주를 통해 깨닫게 되고, 이는 그녀의 삶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녀의 직업적 정체성과 삶의 조건은 여전히 냉혹하며, 결국 이야기는 비극적인 결말로 향한다.
『파과』는 무엇보다도 ‘노년 여성’이라는 흔치 않은 주인공을 내세운 점에서 특별하다. 킬러라는 극단적인 설정이 오히려 그녀의 내면적 고독과 존재의 불안을 더욱 부각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또한 작가는 조각의 몸의 노화와 감정의 굴곡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인물의 심리를 독자에게 밀도 있게 전달한다.
이 소설은 ‘무너져가는 존재의 품위’를 다룬다. 조각은 결국 실패하고, 보호하려던 소년도 지켜내지 못하지만, 독자는 그녀가 인간적인 감정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통해, 실패 속에서도 어떤 존엄함이 남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파괴’와 ‘파과’의 경계에서, 우리는 끝내 완전한 구원은 없더라도, 아주 잠시 존재의 온기를 만져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결국 『파과』는 죽음이나 폭력이 중심이 아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군가를 향한 연민과 책임감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조각의 마지막 선택이 비극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지키고자 했던, 유일하게 인간다운 선택이기도 했다.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니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됐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