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기준으로 116쪽에 불과한 이 책은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작품’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1985년, 나라 전체가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며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뉴로스. 부유하진 않아도 먹고사는 데 부족함 없이 슬하에 다섯 딸을 두고 안정된 결혼 생활을 꾸려가는 석탄 상인 ‘빌 펄롱’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펄롱은 빈곤하게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느 친절한 어른의 후원 아래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그런 본인이 그저 ‘운’이 좋았음을 민감하게 자각하는 사람이다.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직업이 있고, 딸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으며, 따뜻한 침대에 누워 다음 날 어떤 일들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안온한 일상을 언제든 쉽게 잃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잊지 않고 살아간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침, 펄롱은 수녀원으로 석탄 배달을 나가 창고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불법적인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게 된다. 스스로에게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질문을 던지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지만, 아내를 비롯한 그를 둘러싼 세계는 평온하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시할 것들은 무시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그를 침묵하게끔 한다. 수녀원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마을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던 펄롱은 위험이 예견된 용기를 내야 할지 아니면 딸들과 가정을 위해 자신도 침묵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그 위태로운 갈림길 앞에서 불안과 동시에 어떤 전율을 느낀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 움츠러든 펄롱은 마을에 흐르는 강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강물은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며.
이 소설은 단순히 어떠한 사건 자체에 대한 고발이 아니다. 사건은 단지 사회의 문화나 환경이 한 소시민의 도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포착하기 위한 장치로서 작용할 뿐이고, 그 안에서 개인의 내면을 뒤따라감으로써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삶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드러내려고 의도하지 않았으나 드러난 것들이 의미하는 바도 없지 않다. 유럽에서 가장 완고하다고 여겨지는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 그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배경이라는 점에서 이야기의 비극은 강화된다. 그러나 그 비극 속에서 쉽게 절망하지 않고, 모두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때 문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두는 한 사람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찾는다.
인간이 한 구성원으로서 안정적인 위치에 있기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어두운 면에 대해서 눈을 감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일반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위한 펄롱의 양심처럼 우리 마음 속에서 말하는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과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