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소유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내 이야기이다. 탐독하진 않지만, 유난히 탐스러운 책은 소유하고 싶다. 소유하는 것 만으로도 마치 이 책의 지식이 영원히 내 것이 된 거 같은 우스운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이 나에겐 그런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언젠가 들렀던 사상 부산도서관에서 숱하게 많은 책 사이에 우연히 손 끝이 머물렀던. 잠시 꺼내든 책은 삽시간에 나를 작가의 세상으로 옮겨 놨다.
작가의 글발에 매료되어 꼭 가지고 말리라 생각했던 책이 감사하게도 내 손에 들어왔다.
[언어‘들’ 사이에서만 거둘 수 있는 것이 있다. 경계에서 사는 삶은 고단하지만, 경계에서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낯선 언어가 익숙한 세계를 휘젓는 철학적 순간을 만나는 것은 고단한 경계인이 얻는 축복이다. 그 축복을 나누고 싶었다. (10쪽)]
기꺼이 이 책을 소유하게 만든 저자 소개를 하자면, 이름은 이진민 작가로 미국을 거쳐 현재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 미국, 독일 세 나라에서 삶을 꾸려온 작가는 스스로를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라 칭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타국에 살고 있으니 아무래도 쓰는 언어가 다르고, 다른 언어만큼이나 문화와 환경도 달라서 세상을 너르게 보는 시각을 갖게 해주었으리라. 그렇기에 경계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글을 쓰는 작가로서, 일상의 언어로 철학을 전하는 철학자로서 또한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지식에 철학적 사고를 덧입혀서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현 사회를 바라보는 따뜻하고 연민 가득한 시각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든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작은 단어 안에 든 큰 세계' 라는 표현으로 앞으로 나누게 될 자신의 글을 따끈하게 예열한다.
'작은 단어 안에 든 큰 세계'. 이 짧은 문장이 이 책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책은 독일 단어 총 16개를 골자로 전개되는데, 단어 하나하나 엮인 이야기들이 흥미로워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작가가 소개하는 첫 단어는 바로 '파이어아벤트 Feierabend'라는 단어이다.
저자가 독일에 와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단어로 우리말로 치면 하루 일을 마치고 회사를 나설 때 하는 인사라고 한다. 이 단어에는 퇴근의 의미를 넘어 진짜 휴식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원도 축제나 파티의 의미가 담긴 파이어Feier와 저녁이라는 뜻의 아벤트Abend가 합쳐진 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의 차원을 넘어 '축제가 있는 매일 저녁'을 보낸다는 관점이라니!
퇴근 후 시간에 얼마나 큰 의미를 담은 말인지 알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우리의 퇴근 풍경을 떠올려봤다. "수고하셨어요", "안녕히 계세요", "내일 봬요" 등등이 먼저 떠오른다. 물론 "푹 쉬라"는 인사도 건네지만 '파이어아벤트 Feierabend'와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단어 하나에도 참 많은 차이점이 보인다.
인상깊었던 단어 하나를 더 꼽자면 중반부에 나오는 '이레네 슈바이네훈트 INNERER SCHWEINEHUND'이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내 안의 돼지개'이다. 돼지나 개가 들어가면 뭔가 어감이 좋지 않을 거 같지만, '삶의 태도'와 관련된 낱말로 '축 늘어지고 싶은',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내면의 소리를 뜻한다. 이 낱말을 설명하기 전에 뿌려 놓은 작가의 서두가 유머러스하고 재치가 넘쳐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당장 친구하자고 손내밀고 싶을 정도였다. 파워 내향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고 독일사회에서도 게으름이란 극복의 대상으로 치부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마음을 조금 더 따스하게 보듬는다. 그래도 된다고.
인생은 생각보다 긴 싸움이기때문에 나도 너도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늘어지는 시기를 통해서 다시 일어설 시간을 갖는 것.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치유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듯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말하는 '작은 단어 안에 든 큰 세계'에 나 또한 빠져들게 된다. 우리말이든 외국어이든 단어에 역사와 정신과 문화, 그리고 삶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 거 같아 평소 쓰는 단어들도 조금 더 신중하게 톺아보게 된다. 매일 내뱉는 '안녕하신가요?'라는 인사말이 우리가 만나지 못한 사이 상대가 평안한지를 묻는 말이듯, 조금 더 따스하고 세심한 마음을 담아 상대의 안부를 물어겠다. 옅은 미소도 잊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