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등장인물은 눈에 상처를 내고 그림자를 이쪽 세계에 남겨두고 암묵적 계약을 맺으며 ‘불확실한 벽 도시’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이 자신의 이상향인 듯 매일 꿈을 읽으며 산다. 그러나 그런 삶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실현하는 곳이다. 꿈을 꾸는 곳은 나와 그림자가 분리되는 곳이다. 이는 나에게서 그림자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빼앗는 곳이다. 그런 불확실한 곳에서 주인공이 그랬듯이 우리도 벗어나야 되지 않겠는가?
흰옷을 입은 여자가 손수건을 흔들며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저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태워주지 않는지 페르미나 다 사가 신기한 여기고 있자 선장이 저건 물에 빠져 죽은 여자의 망령이며, 지나가는 배를 건너편 해안의 위험한 소용돌이 또 그로 꾀어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르시아 마르크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언급되는데, 이 부분이 핵심이라 생각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 두 소설 모두 현실과 비현실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가끔 비현실적인 것이 매료된다. 아니 그런 꿈을 꾸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이 힘들다는 이유로 벗어나고 싶어 비현실적인 곳을 동경한다. 나도 가끔씩 그런 꿈을 꾼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하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긴다. 그런 후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에서 주인공은 서번트 증후군 아이에게 흥미가 생겼고, 뜻하지 않게 아이에게 벽 너머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후에 아이는 벽 너머의 도시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어른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의 말 한마디가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말. 경험담을 입 밖에 내뱉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좋은지 나쁜지 판단이 안 선다. 삶의 기준이 없는 아이에게 현실이 아닌 낙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꿈같은 곳에 가려고 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생각을 확장시켜주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서번트 아이에게 불확실한 벽 너머의 도시를 이야기하며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 아이는 결국 현실에서 사라졌다. 현실에서 사라진 아이만 놓고 본다면 좋은 일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어떠하겠는가? 부모뿐만 아니라 다른 형들도 1주일 동안 아이를 찾는데 매진한다. 꿈을 찾는다며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아이, 아이 아무 말 없이 증발해버린 아이. 그런 아이를 찾기 위해 밤낮 잠 못 자는 가족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이게 '불확실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중적인 의미다. 불확실하기에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위기가 될 수 있다. 불확실한 상황은 극단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나의 선택이 어떤 기회로 작용할지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