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흰』은 단순한 소설이나 시집의 범주를 벗어난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이 책은 ‘흰색’을 주제로 하여 저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상실,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를 촘촘히 엮어낸다. 책의 첫 장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언니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시작되는데, 그 순간부터 ‘흰’이라는 색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 시작과 끝을 모두 품은 상징이 된다. 눈, 소금, 치아, 종이, 달빛 등 다양한 사물과 풍경이 흰색으로 묘사되는데, 각각의 단어는 독립적인 글처럼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저자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흰색이라는 색이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일반적으로 흰색은 순수함이나 깨끗함을 상징하지만, 작가에게 흰색은 사라짐과 공허함, 혹은 다시 태어나는 가능성까지 동시에 담고 있었다. 특히 흰색 눈밭 속에서의 침묵이나 흰 천으로 덮인 죽은 이의 얼굴 같은 이미지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유한성과 맞닿아 있어 깊은 울림을 주었다.
또한 이 책은 읽는 내내 시집을 읽는 듯한 호흡을 요구했다. 각 장이 짧고 파편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어 문장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울림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빠르게 읽기보다는, 한 문장에 오래 머물며 의미를 곱씹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글을 읽는 행위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감각을 확장하는 일임을 느꼈다.
『흰』은 한 개인의 상실에서 출발했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 역시 잃어버린 존재와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것들을 어떻게 마음속에서 ‘흰색’으로 정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흰』은 죽음과 상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살아 있는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고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나는 ‘흰색’이 단순히 공백이나 무(無)가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의미와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강의 언어는 차갑고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서 더 크게 울리는 삶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흰』은 나에게 하나의 색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는 길을 보여준 특별한 책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