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어떤 소설처럼 뚜렷한 줄거리나 극적인 전개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런 식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란 걸, 몇 페이지 넘기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작가 한강은 흰색이라는 단어 하나로 시작해, 죽은 언니를 향한 애도의 감정, 삶의 무게, 인간 존재의 가벼움과 단단함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준다. 흰 눈, 흰 쌀밥, 흰 옷, 소금, 백지, 뼈, 달걀껍질, 무명천. 사소하고 평범한 사물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과 감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가 있다. 생존하지 못한 존재, 겨우 두 시간밖에 이 세상에 머무르지 못했던, 그 부재의 존재가 오히려 삶 전체를 끌고 간다. 나는 이 설정에 오래 붙들렸다. 살아남은 동생, 그 동생이 어른이 되어, 언니를 대신해 살아낸다는 감각.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지금 누군가의 무게를, 존재하지 않거나 떠나간 무언가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고 페이지를 덮었다. 단지 내용이 무거워서가 아니다.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깊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한강의 문장은 감정을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없이 절제되어 있고, 그 절제 속에서 더 큰 울림이 나온다. 말하지 않은 것이 말한 것보다 더 많다는 느낌. 그것이 이 책의 힘이다.
흰색은 결국 모든 색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내 안의 공백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야 할 결핍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풍경처럼.
『흰』은 슬픔을 견디는 방식에 대해, 기억을 보듬는 방식에 대해 말하는 책이었다. 죽음과 부재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삶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 조용한 책 한 권을 통해, 내 삶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위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