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의 속절없이 빠져드는 화학전쟁사"는 과학자이자 소설가인 곽재식이 한반도의 전쟁사 속에서 화학 지식이 어떻게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는지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 교양서다. 저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개화기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새로운 관점, 즉 ‘화학’이라는 렌즈로 바라본다. 이 책은 단순한 전쟁사나 무기 발달사가 아니라, 전쟁의 승패와 국가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화학적 요소들을 네 가지 대표적인 에피소드로 설명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에서 등장한 ‘포차’라는 무기다. 포차는 돌을 던지는 대형 투석기였는데, 그 핵심은 돌을 멀리 날릴 수 있게 해주는 밧줄의 강도와 내구성에 있었다. 밧줄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 즉 식물 섬유를 화학적으로 처리해 내구성을 높이는 기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밧줄의 재료와 처리 방법에 따라 무기의 성능이 달라졌고, 이는 결국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
두 번째는 후삼국 시대 견훤의 기병대와 말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 오랜 시간, 먼 거리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말의 근육 속에서 에너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 즉 생화학적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저자는 ATP라는 에너지 분자가 어떻게 근육을 움직이고, 이로 인해 전투에서 기병대가 얼마나 유리해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처럼 생물학과 화학의 원리가 실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고려 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의 명분으로 내세운 ‘아교’의 화학적 특성이다. 아교는 활을 만드는 접착제로 쓰였는데, 장마철에는 습기 때문에 아교가 약해져 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내세운 ‘아교가 약해져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당시 무기의 성능에 큰 영향을 주는 중요한 과학적 근거였다. 이처럼 작은 화학적 차이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19세기 조선 개화기, 일본의 군함 운요호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일본은 석탄을 연료로 하는 증기기관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위협했고, 조선은 결국 개항하게 된다. 석탄의 화학 에너지가 군사력의 핵심이 되었고, 이는 근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저자는 석탄의 연소 원리, 증기기관의 작동 방식 등 근대 과학기술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꿨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전쟁과 화학이라는 두 영역을 연결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과학적 원리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새롭게 조명한다. 작은 화학적 차이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