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은 여러 이야기를 직조한 다성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불과 10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텍스트도 있고, 중편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긴 분량의 이야기도 있다.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실은 독자로 하여금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듯이 읽으며 사색을 하도록 유도하는 철학적인 이야기들이다. 또한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느낌과 해석이 가능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텍스트이기도 하다.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선, 면, 구체들,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본문 280쪽)
장르 또한 다양해서 여행일지나 르포르타주는 물론, 서간문이나 강연록 형식의 글들도 공존하는데, 그중에서 인체나 내장 기관을 전시한 박물관에 대한 관람 기록은 추리물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쓴 에세이도 있고, 바쁜 여정을 쪼개어 기차역에서 무릎 위에 책을 받쳐놓고 쪽지에 휘갈겨 쓴 단상도 있다. 트렁크에 담긴 구겨진 짐처럼 두서없고, 혼란스러운 형태로 다채로운 에피소드가 쉼 없이 나열된다.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본문 35쪽)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또한 시간적·공간적으로 서로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발견된다. 공항에서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서로 마주치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된 에피소드의 후속 스토리가 뒷부분에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시체를 박제하여 ‘호기심의 방’에 전시한 프란츠 1세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는 딸의 사연, 크로아티아로 여름휴가를 떠났다가 아들과 아내를 잃어버린 사내의 이야기, 공항에서 시리즈로 전개되는 여행 심리학에 대한 강연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날 때 즈음, 다음 에피소드의 공간적 배경에 대한 단서가 은밀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뉴질랜드를 발견한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의 에피소드에 이어 호주의 한 해변에서 길을 잃고 죽음을 맞은 고래의 사건이 언급되고, 그 뒤로 호주로 짐작되는 나라로 이주한 폴란드 연구원의 사연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러한 단서를 찾아보고, 서로 연결되는 요소들을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