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이다. 그 시절 일본의 상황이 이야기에 많이 담겨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그 누구보다 잘 그린 작가가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내가 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순된 행동을 할 때가 많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든 타인의 행동이든 그것을 꼭 이해의 범주에 넣으려 하고, 그러지 못할 때 그 대상을 향해 책망이나 비난을 한다. 물론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라면 비난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그냥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비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다. 나도 이 책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이해되지 않는다. 모순덩어리이고, 그들에게 반박과 조언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 또한 불완전한 사람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망가뜨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나의 세게에 너무 빠져 있는 것 같으면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는 시도를 해야한다. 뭐든지 균형이 중요한데,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자신에 갇혀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균형을 이루기 위해선 나 자신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흘려가는 대로 흘러갈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라 해서 자신에 대한 통제를 통해 나아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누굴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하기 싫으면 싫은 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밥 벌어 먹는 선에서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와타나베와 나오코, 와타나베와 미도리, 기즈키와 나오코가 그랬듯 서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언어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새겨진 그들의 언어는 어느덧 읽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와 우리의 젊음,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억, 그 순간들을 되살려 낸다.
1960년대 일본에서 일어난 어느 청춘의 아픔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울림으로 감동을 준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이 보여 주는 보편성과 불변성은 이 작품을 ‘오늘의 고전’ 중 한 편으로 다시 만나고, 또 그 만남을 설레며 기다리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경구와 비틀스의 명상적이고 우수 어린 멜로디, 감각적인 도시 생활의 풍경과 서정적인 숲 속의 풍경, 구원받지 못한 사랑과 사랑을 통한 구원이 공존하는 스무 살의 어느 날.
한편 소설을 빛내는 아름다운 언어와 표현을 섬세하게 손질한 엄선한 번역과 편집은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정수라 불리는 이 작품을 만나는 기쁨을 배가할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을 이해하는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 워낙 작가가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놓았다 보니 소설 속 인물이 마치 실존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와타나베는 어떤 인물일까, 등등 나는 그정도의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어본 적이 없어 이야기나 와타나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책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나사 하나씩 빠진 듯한 모습이었고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이었다. 미도리가 그나마 밝고 나이에 맞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도 돌아이 기질이 있었다. 그것도 누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전치 못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러한 설정이 이해가 되었고 책에 심취해 읽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가슴 깊이 머물러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