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성장을 향한 관심'이며 삶은 '성장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사랑은 '성장의 과정에 대한 열렬한 지지 내지는 관심'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며, 살아있다고 느끼고 있는가?
▶ 우리는 삶을 사랑했는가
에리히 프롬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하지만 난무하는 폭력, 무관심, 소비지향적 태도, 인간의 수단화 등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거나 삶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다.
▶ 나는 삶을 '여전히' 사랑하는가
「분실물이 돌아왔다」라는 책을 읽고 예전에 잃어버렸지만 되돌아왔으면 싶은 물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물건은 대학교 4학년 때 교양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가을을 듬뿍 담은 나뭇잎이었다.
그 나뭇잎을 찾고 싶은 이유는 별거 없다. 가끔은 아무것도 안해도, 되려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여도 이상하리만치 나를 좋아해주고 긍정적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내 할 일을 잘 해내야 / 내가 유용하고 쓸모 있어야 /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진 사람이어야 / 번듯한 내 직장이 있어야 / 우리 집이 잘 살아야 등 노력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를,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길 바라나보다. 그 어떤 시린 계절도 살아내게 하는 사람이 고픈가 보다. (되고싶은건가)
「분실물이 돌아왔다」라는 책을 읽고 쓴 독후감 中
결국 왜 그 나뭇잎을 찾고 싶은지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독후감의 끝을 위와 같이 맺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서문에서 어렴풋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최근의 나는 아마 퍼포먼스에 더 집중하는 삶을 살지 않았나. 나 자신 혹은 나의 존재보다는 사회적으로 습득한 어떤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느끼려 해 많이 피로했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엔 당연히 삶을 사랑한다 자신할 수 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나의 사랑은 꽤 많이 뒤틀려 있었다. 프롬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기심과 자기애를 구분하지 못하며 무력감을 감추기 위해 사랑을 흉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사랑하는 척 하느랴고 일이라는 진통제에 취해 나를 돌보지 않았으며, 고요하게 삶을 대할 수 없어 이리저리 약속을 만들고 무의미한 관계에 집착하는 분주함에 속아있었는지도 모른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전제 앞에서 갈등을 회피하며, 고유의 나를 찾아가기보다 어쩌면 타인과 동등해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 않은가 한 번 더 생각해본다. 삶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 나는 '앞으로' 삶을 사랑할 것인가
프롬은 삶을 사랑하는 과정은 어쩌면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다 말한다. 인간은 안전을 뜻하는 이전 상태를 떠나기 무서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왜곡된 기준으로 삶을 대하는 것이 더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구불구불 굽이 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목적지(=삶을 사랑하는)로 가는 곧은 선이 될것이다. 프롬이 말하는 '삶을 사랑하는 태도'는 결국 나를 더 자유롭고 완전한 상태에 이르고 더 풍성하게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힘이 드는 일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앞으로도 삶을 사랑하겠다. 옳은 방식으로.
[출처] [독후감]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by 에리히 프롬|작성자 옥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