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중력 이론 선구자이며,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이 책을 통해 '시간'에 대해 3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1부. 시간 파헤치기
일반적으로 시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부순다. 시간의 유일성, 방향성, 현재라는 관념, 시간의 독립성, 연속성을 부순다.
모든 장소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르며, 지나온 경로가 다르면 경과한 시간도 다르다. 해변과 산꼭대기의 중력 차이와 그에 따른 시간 지연을 설명하면서, 물체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쪽으로 향한다고 한다.
중력의 차이가 없고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우주 공간에서 물체는 ‘떨어지지’ 않는다.
물리학의 법칙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와 과거를 분리하지 않는다. 법칙에 따른 변화를 거꾸로 돌려도 법칙을 만족한다. 물리 법칙은 시간의 방향을 주지 않는다.
유일하게 과거와 미래를 분리하는 물리 법칙은 열역학 제2법칙으로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비가역적인 모든 현상에는 열출입이 관여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희미한 눈으로 봤을 때 동일한 거시계의 물리량을 주는 서로 다른 미시 상태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간은 희미하게 볼 때 발생한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주의 거대한 스케일에서는 ‘지금’을 합의할 수 없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이다. 항렬이 인접한 가계도에서만 유효하듯이 현재도 인접한 사건들 안에서만 유효하다. 어떤 사건이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건들의 집합은 광원뿔로 표현되는데 그 외 시공간 상의 좌표는 그 사건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들의 관계 속에서 공간, 변화의 척도로서 시간을 이야기하였다. 반면 뉴턴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이면에 독립된 공간과 시간을 상정했다.
아무것도 없어도 ‘진짜’ 공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진짜’ 시간이 따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 이후가 그랬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대립도 결국 ‘두 개념 전략 중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가?’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좀 더 의미가 있었다. 물리법칙은 이제 절대적 시간을 상정하지 않고 ‘변화’ 속도의 상대적 관계만을 기술한다.
양자역학의 세 가지 발견은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과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으로 요약된다.
불확정성 원리로부터 다룰 수 있는 물리량의 최소 단위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물리량들이 양자화된다. 시간도 연속성을 잃고 양자화된다.
서로 방향이 다른 광원뿔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진 것도 모자라 여러 장의 시공간 그림이 중첩되어 요동친다.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2부. 시간이 없는 세상
시간은 유일함, 방향, 현재, 독립성, 연속성을 잃어 너덜너덜해졌지만 세상이 ‘사건들’의 네트워크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존재보다는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 뇌는 두 위치에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두 신호를 받지 못한다. 움직이는 무언가와 관련된 하나의 신호만 감지한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입술은 사물이고 입맞춤은 사건이다. 세상은 입술이 아닌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세상을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절대 시간이 없이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변화하는 양들이 있다.
개중에는 매우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태양의 일주운동, 진자의 왕복운동처럼 말이다. 내가 어디 있는지를 랜드마크와의 위치 관계로 설명하면 편하듯이, 상당히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변수와의 관계로 어떤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과학은 변수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변화하는지 설명해 주면 된다. 이때 특별한 변수 하나를 ‘시간’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외부에서 본 세상’은 난센스다.
3부. 시간의 원천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본다. 세상의 기본 문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냥 어떤 식으로든 ‘등장’하는 것이 상당히 많다.
고양이, 게임팀, 위와 아래, 구름의 표면, 우주의 회전 등이 그것이다. 시간도 뒤늦게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특정 계에 대한 흐릿한 시각인 거시적 상태가 하나의 시간을 결정한다면? 계가 열 교란 상태에 있을 때, 그 계는 동일한 에너지를 갖는 모든 배열을 거쳐 지나간다.
(거시적) 평형상태이다. 한 거시 상태를 만드는 미시 상태의 수와 관련된 양인 엔트로피처럼 시간도 에너지에 따라 정해지는 특별할 것 없는 물리량일 수 있다.
‘선험적으로’ 시간의 역할을 하는 물리량이 없더라도. 거시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시간을 ‘열적 시간’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가장 비슷하다.
왜냐하면 열적 시간과 거시적 상태의 관계가 바로 우리가 아는 열역학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의 전반적인 차이는 세상의 엔트로피가 과거에 낮았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어떤 희미함에 대해 보느냐에 따라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다.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기차에서 뛰고 있는 아이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고 해서 아이가 기차 창문으로 뛰어내려 ‘지상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가 멈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차와의 관계 속에서’ 아이가 멈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B와 관련 있는 A의 엔트로피는 A와 B 사이에 ‘물리적’ 상호 작용들이 구분하지 않는 A의 배열 수를 계산한다.
세상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낮은 엔트로피다. 낮은 엔트로피는 특수성에서 나온다. 특별함이 없어진, 열평형 상태가 되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낮은 엔트로피를 공급받는다. 열평형은 이루어지지만, 엔트로피가 비교적 높은 여러 개의 차가운 광자를 방출하고 엔트로피가 비교적 낮은 뜨거운 광자를 받는다. 분산된 구름보다 중력 수축에 의해 응축된 구름이 엔트로피가 더 높다. 응축된 구름이 실공간에서는 더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입자들의 속도가 더 다양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위상공간에서는 분산되는 것이다.
흔적은 과거에 원인을 둔다. 흔적이 남으려면 무엇인가 정지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에너지를 열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열이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탄력적으로 튕기고 그 어떤 것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 각자를 세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세상을 성찰하고 정교하게 설명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두 번째로 우리는 세상의 요소들을 실체들로 조직화한다. 경계를 근사적으로 긋고 범주화한다. 그렇게 신경 동역학계의 고정점으로서 ‘사물들’과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나의 존재는 일차적인 경험이 아니다. 일차적인 경험으로서 세상을 보고, 어느 순간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가적 특성을 지닌 인간임을 투영하여 ‘나 자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우리와 닮은 존재들(인간)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반영이다.
세 번째 요소는 기억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역사이고 이야기 주제이다.
물리학적 소견과 철학적인 다양한 관점을 섞어 시간에 대해서 분석한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더러 있었지만, 순간순간 공감가는 내용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시간이 연속적이지 않고 사고와 사건의 점들이 섞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어떤 사건과 내용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대 물리학의 근간인 '인과율'과도 배치가 되는 내용이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던지, 흐르지 않던지 그 시간이 생물학적으로 노화되는 것을 나타내는 척도라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결국 다양한 관점으로 보일 수 있는 시간속에서 결국 우리의 생각과 행동들이 남아있을 것이며, 그것들이 쌓여 현재 우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