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자살 직전 혹은 이미 자살한 자의 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한기마저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책 뒤에 있는 짧은 해설을 읽다가 작가가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인생의 책’이라고 추천하기도 했고, 민음사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품인 데다가, 마침 알라딘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얼마 전 다른 책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에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음산함, 자기혐오, 파멸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이렇게 제대로 살려낸 소설은 처음이었다.
자살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 스산함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묻어 나는 작품이었지만, 섬이 된 한 인간의 심리 묘사에 있어서 나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그 내용이 아무리 처절해도 궁극적으로는 대부분 구원을 빛을 비추는 데 반하여, 이 작품에선 구원과 같은 반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저 세상과 인간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 인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서히 술, 담배, 창녀, 마약의 힘에 눌려 파멸해 가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자살로 마무리를 지을 것 같았는데 저자는 내 예상과는 달리 주인공 요조의 운명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이게 어쩌면 단 한 가지 요조에 대한 저자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저javascript:saveEpilogue(1)자 자신이 요조를 대신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마무리는 저자의 삶 자체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적고 보니 섬뜩하다. 주인공 요조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했던 것 같다.
사람을 생각할 때면 불안과 공포에 짓눌렸다. 이웃과 거의 대화도 못 나누고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고는 스스로 만족한 채 실행에 옮긴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던 그가 인간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익살’이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생각해 보면 섬뜩하기만 한 이율배반성이 긴장 가운데 극도로 표출된 사람이 바로 요조였던 것이다.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흔히 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길들여진다.
술과 담배와 여자, 그리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뻗친다. 그런데 요조가 이런 것들을 손댄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순된 본능이 요조 안에서도 꿈틀대고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그가 선택한 방법이 하필 타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조의 삶과 그가 토로하는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타락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특히 그가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는 표현 앞에선 더욱 그랬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난의 화살을 요조가 아닌 세상으로 어느 정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 요조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