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경하는(당연히 이 인물은 소설적 인물이다.) 5월의 광주에 대한 소설을 썼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23쪽) 생각했던 그는 정작 소설을 끝내고도 한참 그 소설에서 놓이지 못하고 있다. 경하에겐 만주와 베트남 등에서 '역사를 통과한 여성들'(34쪽)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남겨온 친구 인선이 있다. 고향인 제주 중산간에서 목수가 된 인선이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부상을 입고 자신을 찾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경하는 오랜만에 인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제주의 눈보라를 무릅쓰고 1948년의 제주, 정심의 이야기 속,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락도 설명도 없이'(167쪽) 놓인 풍경에 닿는다.
5월 광주, <소년이 온다>의 모진 문장을 읽은 독자들이 그 시대를 살았던 것처럼 깊은 상처를 경험했듯, 작가도 '그 소설'을 쓰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듯하다고 한강은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말했다. 죽은 사람의 얼굴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녹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1948년의 소녀가 그 이후에도 긴 삶을 살아냈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작가가 소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강은 하게 만든다.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에도 한강의 문장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있었다고 믿게 된다.
학살 이후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한 생존자의 길고 고요한 투쟁의 서사가 있다. 공간적으로는 제주에서 경산에 이르고, 시간적으로는 반세기를 넘긴다. 폭력에 훼손되고 공포에 짓눌려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딸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진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 곁의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