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박완서 작가가 쓴 660여 편의 에세이 중에서 가장 글맛 나는 대표작 35편을 묶은 산문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소설가 박완서를 실제로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산문집이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 그의 삶의 형태를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 순으로 글이 엮여이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는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박완서 작가의 일대기에서의 굴곡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다.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잔잔하고 소곤소곤 말하듯이 글을 이어가는 작가의 필체에 편안하게 읽어 갔다. 35편의 에세이 중에서 3편을 골라 나의 생각을 덧붙여 써본다.
▶보통 사람
이 풍진세상에서 노력한 만큼만 잘 살기를 바라고 딴 욕심이 없다면 그건 보통 사람을 훨씬 넘은 성인의 경지이다. 57페이지
나는 이런 며느리가 우리 집안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할 때 은근 설레었다. 그러나 며늘님을 고르는 그런 호강은 주어지지 못 한 체 두 아들이 일찍이 짝을 찾아 결혼했다. 이제 지인들을 만나면 자녀들의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다. 어떤 이는 딸의 사윗감으로 집안은 우리보다 너무 차이는 안 나면 좋겠고, 직장은 처자식 굶지 않을 정도만 되면 되고, 어떤 이는 바지만 입으면 된다는 등 썰을 푼 적이 있다. "크게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인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보통 사람을 원하지만 정작 보통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없고 그 수준도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라테 시절 나는 막노동으로 자식을 기르셨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살기 팍팍했지만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의 가정 형편란에 항상 우리는 "중"이라고 써 냈다. 부모님은 중간 정도, 보통 정도로 살고 싶은 마음에 그리 쓰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가난한 것을 굳이 선생님에게 알리는 것이 창피해서 부모님의 의견에 동의했던 것 같다. 우리는 항상 중간을 선호하고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으로 살기를 욕망하지만 삶이 보통 사람으로 살게끔 놔두지 않는 것 같다. 보통 수준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 보통 사람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나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수준이 어디까지인지 모르면서.. 작가의 말처럼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해야 가능한 것은 아닌지.....
깊은 상념에 빠진다.
▶행복하게 사는 법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139페이지
인간관계를 항상 힘겨워하는 나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 꼴 보기 싫은 이가 꼭 내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이 인생 이치인가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나태주 풀꽃 시를 읽고 시선을 달리 보았다. 괜히 주는 것 없이 싫은 사람도 자세히 보면 예쁜 구석이 있고 아주 오래 시간을 두고 보면 그 사람도 사랑스러운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당시 누구나 예쁘게 사랑스럽게 창조하시면서 "좋았더라" 하셨다. 내가 그들을 편견과 선입견의 시선으로 보았기에 이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간과하진 않았는지. 그들의 삶의 이름과 색깔, 모양을 자세히 오래 보다 보면 나의 이웃되고 친구가 되어 꽃밭을 이루며 살수도 있는데..
박완서님이 말하는 행복하게 사는 법은? 일류 대학, 최고의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더 높은 자리를 욕망하면서 열등감에 불행하게 만들 수 있고 돈 세는 일은 갈증 난 이가 소금물을 마시듯이 잠시의 목마름은 채울 수 있어도 곧 더 목말라질 것이라고 한다. 행복은 돈도 권력도 아닌 나와 관계하는 이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삶이라고 한다. 하루하루를 들에 핀 풀꽃을 보듯이 나를 사랑스럽게 당신을 이쁘게 보면서 사는 행복한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행 가방
인생의 마지막 여행 가방 속에 남루한 내 영혼과 미련스러운 짐들을 보고 신은 혹시 그래도 잘 살아냈다고 하지 않을까. 247페이지
미국에 아들 보러 갈 때 캐리어 속에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들고 간다.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가지고 가면 아들이 좋아할 것 같고 그러면서 짐은 한가득 된다. 그러나 정작 짐을 풀어 놓으면 별거 없어 보이고 심지어 꼭 필요하고 결정적인 물건은 빼 먹고 안 가져왔다.
인생은 소풍이라고, 여행이라고 말한다. 내 인생의 여행 가방 속에 그때 그랬으면 하는 후회의 순간, 악다구리 쓰며 싸웠던 어느 날, 미워서 치를 떨었던 사람, 이멜다의 구두처럼 욕심 가득한 것들로 가방 속 짐이 한가득 될까 겁이 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뚝뚝하지만 따스했던 말들, 어릴 적 아들의 사랑스러운 재롱 등 편린 같은 낡고 헤진 추억들을 가방에 넣어 가도 좋겠지만 나이 든 지금은 풀지 못했던 관계들을 풀어, 온기 가득한 축복의 말들로 가방을 꾸렸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작가도 말한다. 인생의 마지막 여행 가방에 수치스러운 속옷도 처절하게 살아왔던 흔적의 노트들도 있으나 신 앞에서 오냐 그래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