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이 책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대입 논술준비를 위해 꼭 읽어야하는 책 리스트에 올라있던 것 중 하나로 기억한다. 그당시 나는 이같은 책을 진짜로 읽기보다는 요약본 또는 핵심이 되는 내용을 몇줄로 정리한 것을 읽고 넘기는 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상식테스트에 나오는 수준(책의 저자와 제목 연결짓기)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당시 내가 기억하는 소유냐 존재냐의 핵심은, 무한정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 실현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하여 인간 소외로 이어진다는 것 정도였다.
이번에 정식으로 이 책을 읽으며 알게된 것은 저 핵심을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해 일상 생활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사례, 언어에 반영된 사례, 성서에서 나타나는 사례 등으로 쉽게 풀어쓰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아직 끝까지 읽지 않아서 결론지을 수 없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책이 아니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 막연히 갖고 있던 “이런 종류의 책은 지루하고, 다음장으로 되게 안 넘어가는 어려운 책”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어느정도는 깨주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 종교인으로서 성서에서 다루는 소유와 존재에 대한 입장에 대해 읽을 때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는데, 사실 성서 파트는 매우 지루할 거 같다는 생각에 건너뛰려고했기 때문에 대비되는 감정으로 더 재밌었던거 같다.
한가지 알게된 재밌는 사실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아주 몇몇 예외적인 사상(가)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철학자와 종교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소유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성 말살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점점 더 소유를 통해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씁쓸하기까지 했다. 이런 것은 언어에도 여실하게 반영되는데, 이를테면 영어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동사보다는 명사의 활용이 훨씬 증가해온 점을 지적하는데 그 명사를 연결해주는 동사는 have라는 것이다.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떤 것을 먹고(이때도 have를 쓴다)있다 등 일상생활에서 매우 빈번하게 말을 하게 되는 표현을 have+명사의 형태가 아니라 개별 동사로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데도 소유의 형태로 말을 한다는 것이 새삼 공감이 됐다.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ㅇㅇㅇ을 안다, 나는 ~라고 생각한다, 나는 ㅇㅇㅇ을 먹는다 등으로도 얼마든지 표현가능.) 이 과정은 인간이 소유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언뜻 논리의 비약이 있어보이지만 읽을 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여기에 연결되는 논리를 모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중간 과정이 기억이 안나는 것도 있고.) 당연히 인간 소외로 귀결되는 것이다.
일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 중 사랑에 대해 다룬 것도 매우 흥미로웠다.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랑의 종류 중에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 대해 소유냐 존재냐를 적용해보면 쉽게 와닿는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라는 말은 너무 흔하고 당연해서 굳이 다시 말할 필요 있나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 명제가 영원히 사람들 사이에서 되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부모는 자식을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기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식을 자신이 삶을 잘 살아왔다는 일종의 증거(트로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보상심리 때문이라고 보이는데, 아무리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결국 인간이 행하는 것이므로 소유하고자 하는 유혹(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 어떤 부모도 난 내 자식을 소유해야지 하는 목표를 갖고 그 감정을 갖진 않으리라)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테니, 저 케케묵어보이는 명제는 언제 어디서고 인간사에서 등장할 것이다. 우리가 과연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책에서는 소유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을 의미한다고 표현한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생명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커녕 목을 조여서 마비시키고 질식시켜 죽이는 행위라고 한다.(p.73) 프랑스의 옛 가요의 가사 중에 “사랑은 자유의 자식”이라는 게 있다는데, 너무 공감이 됐다.
마지막으로 지식을 대하는 두가지 양식의 대비도 흥미로웠다. 지식을 소유양식으로 대하게 되면 화자(보통은 선생님, 교수님 등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내 지식 체계에 우겨 넣어 “소유”하려는 방식으로 대하게 되는데, 이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고 추구해야하는 지식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양식에 익숙해지도록 우리는 교육을 받아왔고,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나라는 “양”적인 측면에 집중하여 짜여진 시험을 통해 개인의 학업성공 여부가 판가름 났다. 생각해보면 이런 소유양식의 지식을 대하는 형태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유형은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배운 지식을 최대한 많이 빨리 소유하고 기억하는 것이 이 양식의 테스트에서 훌륭한 결과를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지식(앎)의 특성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헤부르 예언자들, 예수, 에크하르트 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 등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을 떠올리면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책은 말한다.(이들은 에리히 프롬의 사상의 근간을 만들어준 사람들이라고 한다.) 앎(깨달음)은 미망을 깨뜨리고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얆은 표면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서 근원에 이르러 적나라한 현실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p.66) 이것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뚫고 들어가서 비판적이고 능동적으로 진실을 향해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생각해봤다. 과연 내가 지식을 소유양식뿐 아니라 존재양식으로서 접근을 해본적이 있었던지. 그리고 앞으로 존재양식으로 지식을 대할 수 있을지. 이 한권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지식뿐 아니라 삶 전반을 아울러서 소유가 아닌 존재양식으로 대하는 삶을 살아야만 할 거같다는 막연한 생각은 든다. 많이 가져도, 또는 한동안 너무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넣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 이제는 몇시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기 때문이다.